불교 이야기

심心・의意・식識은 어떻게 다른가?

hognmor 2022. 7. 15. 13:28

심心・의意・식識은 어떻게 다른가?

 

[마음이란?]

 

초기불교의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마음의 개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짐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둘째,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진다.

셋째, 마음은 한순간에 한 가지 일밖에 하지 못한다.

넷째,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대상과 마주쳤을 때만이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은 무엇일까. 바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인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가 감각대상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과 부딪쳤을 때 비로소 마음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음을 분류 하면 89가지가 된다. 89가지 마음은 52가지 마음부수라는 심리현상의 도움으로 89가지의 독특한 마음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마음[善心]도 있고, 해로운 마음[不善心]도 있는가 하면 과보의 마음[果報心]도 있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作用心]도 있다.

 

[심心·의意·식識은 어떻게 다른가?]

 

불교는 물론이고 타 종교에서도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모든 심리현상을 마음 하나로 뭉뚱그려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초기불교의 논서인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구분하여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사용하고 있다. 즉 마음을 보통 한자어 심心·의意·식識으로 구분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가 마음이다. 빠알리어로 찌따(citta)라 하고 한문으로 ‘마음 심心’자로 옮긴다. 이때의 마음은 마음의 작용을 말할 때 마음이며,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의 일반을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마음에는 마음이 있고, 마음의 작용이 있다. 이때의 마음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 pañcakkhandhā)에서 식(識, viññāṇa)이고, 마음의 작용은 수(受, vedanā), 상(想, saññā), 행(行, saṅkhāra)이다.

 

그래서 마음이라고 할 때는 마음의 작용을 말할 때 사용한다. 마음은 반드시 마음의 작용을 동반한다. 그래서 마음이 일어날 때는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진다. 이것들은 하나이면서 각각의 기능이 달라 이렇게 분류한다.

빠알리어로 ‘찌따(citta)’라고 말할 때는 회화, 잡색, 여러 가지의 그림, 그런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면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림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비담마에서 사용되는 찌따(citta, 心)는 마노(mano, 意)와 윈냐나(viññāṇa. 識)를 다 아우르는 광의의 개념으로 쓰인다. 영어도 mind, consciousness, state of consciousness 등 다양하게 사용된다.

 

둘째는 생각이다. 빠알리어로 마노(mano)라고 하며, 한문으로 ‘뜻 의意’자로 옮긴다.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감각기관[根, indriya]이거나 감각장소[處, ayatana]의 개념으로만 사용한다. 즉 감각기관을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라고 하는데, 이때의 ‘의意’가 바로 마노(mano)이다. 이것도 마음이지만 감각기관의 하나로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링커로서의 기능을 한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법이라는 대상을 보는데 이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 바로 마노(mano)의 감지 대상이다. 이때의 마노(mano)는 찌따(citta, 心)가 정신적인 것의 본질을 뜻하는 것일 때 그것과 다른 미세한 느낌의 사유와 관계한다.

 

그러나 한자의 번역어인 ‘뜻 의意’자와 마노(mano)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따라서 이 경우만큼은 원어인 ‘마노(mano)’로 불러야 올바른 표현이라고 한다. 의문인식단계에서 의문意門이라고 하지만 ‘마노의 문’이라고 빠알리어로 써야 뜻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의문인식과정을 포함한 안문, 이문 등 오문五門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과정 후에 받아들여져 아는 마음이 마노(mano)이다. 따라서 마노[意]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아는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눈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형상이나 색깔(色)이라는 대상에 대한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일어나고 귀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소리라는 대상에 대한 귀의 알음알이[耳識]가 일어나듯이 마노(mano)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정신적인 대상에 대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마노[意]는 정신적인 대상을 아는 감각장소 혹은 기능이라는 것이다. 눈·귀·코·혀·몸은 물질적인 감각장소이지만 마노[意]는 ‘정신적인 감각장소’인 것이다. 그래서 마노를 마음[心]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마노의 역할에 대하여 링크로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인식과정에 있어서 그 역할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축구 선수 ‘박지성’의 예를 들어 각묵 스님은 설명하고 있다. 마치 박지성 선수가 미들필더로서 공격과 수비를 연결하는 링커의 역할을 하듯이 마노는 대상과 전오식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오문전향의 마음)을 하고 다시 전오식과 의식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받아들이는 마음)을 하는 것이다.

 

글을 보면 마노는 두 가지의 링크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감각대상과 전오식을 링크시켜 주고, 두 번째는 전오식과 의식을 링크시켜 주고 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마노는 오로지 감각기관에서만 사용되는 링커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마노는 오로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에 적용되는 용어로 사용되기 때문에 찌따(citta)와 사용처가 분명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아는 마음[알음알이]이다. 빠알리어로 윈냐나(viññāṇa)라 하며, 한문으로 ‘알 식識’자로 옮긴다. 윈냐나(viññāṇa)는 여섯 감각기관[六根]이나 감각장소[六處]가 그 감각대상[六境]과 부딪쳐서 일어났을 때 일어나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여섯 가지 ‘알음알이’를 말한다. 이처럼 마음의 실제는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윈냐나(viññāṇa)에 기능이 있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식(識, viññāṇa)이 없으면 수·상·행도 없고, 몸이라고 하는 물질도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윈냐나(viññāṇa)는 대상을 접했을 때 ‘대상이 있음을 아는 알음알이’로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과 매 순간순간 맞닿을 때마다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하는 ‘순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 윈냐나(viññāṇa)는 알아진 것이 아니라 알음알이가 매순간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오온에서 말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할 때의 식識 역시 대상을 아는 것으로서 매 순간 변화해 가는 알음알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대상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 하여 취착하게 되면 괴로움[苦, dukkha]을 가져다줄 뿐이며, 그러므로 나라고 내세울 아무런 실체가 없음[無我, anatta)] 통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 심, 의, 식 세 가지는 하나이지만 단지 상황과 역할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복잡한 마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이러한 필요를 느끼신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있어서 세 가지로 분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하겠다.

 

이와 같이 마음을 표현 하는데 있어서 세 가지가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심(citta)과 의(mano)와 식(viññāṇa)은 같은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찌따(citta)와 윈냐나(viññāṇa)는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고, 다만 마노(mano)는 감각기관과 관련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는 심·의·식에 대하여 한글로 표기할 때 심을 ‘마음’으로, 의를 ‘마노’로, 식을 ‘알음알이’로 하여 구분하고 있다.

 

그 외의 마음을 보면 마음과 비슷한 개념인 마음부수와 정신이 있다.

 

첫째, 마음과 함께 하는 마음부수이다. 마음부수를 빠알리어로 쩨따시까(cetasika)라 한다. 마음부수를 다른 말로 심소心所 또는 심리현상, 마음의 작용이라고도 한다. 마음부수는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임무를 맡고 있다. 또 마음부수는 마음 없이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고, 마음 또한 마음부수의 도움 없이 절대로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과 마음부수는 상호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으로 간주한다. 마음부수의 역할은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의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마음 부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첫째,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감각접촉이 같이 일어난다. 이 감각접촉(phassa)의 기능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과 맞닥뜨릴 수 없다.

둘째, 느낌(vedanā)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경험할 수 없다.

셋째, 인식(saññā)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

넷째, 의도(cetanā)가 없다면 마음은 대상을 알려는 어떤 작위도 행할 수가 없다.

다섯째, 집중(ekaggatā)이 없으면 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어떤 정도의 집중이 없으면 대상을 알지 못한다.

여섯째, 생명기능(jīvitindriya) 즉 생명이 없으면 마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일곱째,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 즉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음은 역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없다.

 

여기에 언급된 마음부수는 감각접촉, 느낌, 인식, 의도, 집중, 생명기능, 마음에 잡도리함 등 7가지가 선보였다. 이 일곱 가지 마음부수는 총 52가지 마음부수 중에 ‘같아지는’ 마음부수 일곱 가지이다. 나머지 해로운 마움부수가 개입되면 당연히 해로운 마음[不善心]이 일어날 것이고, 반대로 아름다운 마음부수가 함께 하면 아름다운 마음[善心]이 일어날 것이다.

 

둘째, 오온으로서의 정신이다. 한자어 명(名)으로 쓰이고 빠알리어로 나마(nama)라 한다. 나마(nama)는 보통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에서 쓰여질 때 색을 제외한 ‘수受·상想·행行·식識’ 네 가지를 지칭할 때를 말한다. 즉 정신-물질(名色, nāma-rūpa)에 있어서 정신영역에 속하는 요소인 ‘수受·상想·행行·식識’이 나마(nama)인 것이다.

 

또 나마(nama)가 12연기에서 ‘명색(名色, nama-rūpa)’으로 사용될 때는 식이 빠진 ‘수受·상想·행行’ 세 가지를 말한다. 12연기에서 식識과 명색名色은 ‘식연명색識緣名色’ 또는 ‘명색연육입名色緣六入’의 구조로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여 주는 상호연相互緣으로 설명된다.

 

[출처] 심心・의意・식識은 어떻게 다른가?|작성자 향림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불포교의례집(시다림과 문병의례)  (0) 2022.10.24
붓다의 숨결 따라 걷는 1167km, 43일 간의 대장정  (0) 2022.09.27
苦의 원인과 12연기설  (0) 2022.01.03
사성제와 12연기  (0) 2021.12.20
오온(五蘊)  (0) 2021.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