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

사성제와 12연기

hognmor 2021. 12. 20. 13:49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십팔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십팔계(十八界)란 인간의 주관적 감각기관의 요소인 안계・이계・비계・설계・신계・의계와 객관적 대상의 요소인 색계・성계・향계・미계・촉계・법계, 그리고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서로 만날 때 나타나는 인식작용인 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의식계를 말한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란 십팔계의 첫 번째 안계에서부터 십팔계의 마지막 요소인 의식계까지의 열여덟 가지 모든 요소를 부정하는 말이다. 십팔계는 앞에서 말한 십이처에 육식(六識)을 합한 것이다.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관[육근]과 인식의 대상[육경], 그리고 인식작용[육식]의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십이처와 십팔계가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마음의 영역에 여섯 가지 인식을 하나로 합하여 하나의 의식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눈, 귀, 코, 혀, 몸, 뜻의 각각에 독자적인 인식작용을 내세우고 있는가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십이처의 의처(意處)이며, 후자가 십팔계의 여섯 가지 별개의 인식 -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다. 이처럼 십팔계는 십이처에서 설명하였던 육근과 육경에 육식을 더하면 성립이 된다. 부파불교는 십팔계의 여섯 가지 식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유가(yoga)사 들은 명상을 통하여 식을 더욱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하나의 독립된 법체계를 이루었다. 이것이 유식사상(唯識思想) 또는 유식학(唯識學)이다.

 

모든 것을 부정한 이유는 공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를 뜻하며, 깨달음의 세계는 무위(無爲)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1. 육식의 실체 - 공(空)

인간의 주관적인 감각기능(6근)은 반드시 객관적인 대상(6경)이 있어야만 일어난다. 귀는 있지만 소리가 없다거나, 코는 있는데 대상인 냄새가 없어도 안 되며, 반대로 객관계의 대상은 있지만 우리 주관계의 기관이 없다면 인식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육근과 육경이 합쳐졌을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인 육식도 공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십팔계도 또한 공임이 밝혀질 것이다. 왜 육식은 공(空)한 것일까? 육근과 육경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 작용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육식은 육근이라는 인간의 기관에 숨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육경이라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것일까? 육식은 육근에도 육경에도 숨어 있는 작용이 아니다.

 

다만 접촉, 결합, 연관, 인연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육근에도 없고 육경에도 없는 것이 어떻게 연관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한다면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육식(6識)은 육근에도 육경에도 없지만 서로 연관되고 접촉됨으로서 육식이 연하여 일어나는[緣起]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가지고 딱히 “육식이다.” 라고 고정되게 말할 수 없는 것[無我]이다. 또한 나무를 비벼 불을 냈지만 그 불도 인연이 다하면 꺼지게 마련이듯 육식 또한 인연이 바뀌게 되면 사라지는 것[無常]이다. 따라서 여기에 어떤 고정된 자아는 찾아 볼 수 없다. 의식은 항상하여 고정된 것이 아니며, 주위의 상황과 경계에 따라 인과 연에 의해 항상 바뀐다. 이처럼 육식에도 스스로의 자성이 없으므로 무아, 무자성이며, 항상하지 않기에 무상이고, 인과 연에 의해서 생멸을 반복하므로 연기이며, 이러한 사실을 모두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2. 부정의 논리에 대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앞서 근본불교의 중요한 교설인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를 부정하여 공사상을 천명하고 있음을 알았다. 반야심경에서 부정을 통해 공을 드러내는 논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교설을 차례로 모두 부정하고 있다.

 

바로 십이연기와 사성제를 부정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일체 현상계의 구조인 오온과 십이처와 십팔계를 부정하고 이어 현상계의 법칙인 연기법을 통해 현상계의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차례로 섭렵하는 내용인 십이연기를 부정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근본불교의 모든 교설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인 사성제를 부정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오직 현상계의 올바른 중도적 관찰[조견]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설은 모두가 현상계, 일체, 제법, 현실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반야심경에서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를 우선 다루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처님께서 현상계 일체제법의 법칙[연기]과 속성[삼법인], 존재방식[업과 윤회], 그리고 이 모든 교설의 총설인 사성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당장 현상계, 일체, 제법이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현상계에 대한 여타의 관찰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반야심경에서는 우선 현상계의 구조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먼저 부정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다른 모든 교설에 대해 각각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십이연기, 사성제만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십이연기를 먼저 다룬 것은 사성제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 때문이다. 즉 사성제의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이며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원인의 진리인 집성제를 알기 위해서는 십이연기를 알아야 하기에 우선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일체의 구조를 관찰 하고 십이연기의 교설을 통해 기초 작업이 끝나면 사성제의 부정이 나온다. 이러한 연관 고리를 염두에 두고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부정을 통하여 드러나는 참 진리를 살펴보겠다. 반야심경에 나온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며,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언급하신 교설로의 진정한 회귀를 위하여 방편상 부정의 논리를 이용하고 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한편 반야심경에서 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실 때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내용을 펴셨다. 그러나 출가 수행자에게는 현실을 떠난 깨달음의 세계를 설하셨기 때문에 일체를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3. 사성제와 십이연기

석가모니부처님의 교설을 체계 있게 정리하고 그 실천법을 설해놓은 교설이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이다.

 

경전에서는

『비구들아, 모든 동물의 발자국은 다 코끼리의 발자국 안에 들어온다. 그와 같이 모든 법은 다 네 가지 진리에 포섭된다. 그 네 가지의 진리[사성제]란 무엇인가? 괴로움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고 말씀하셨다.

『마라가야,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때 이웃들은 급히 의사를 불러 왔다. 그런데 그는 나를 쏜 자는 누구일까? 나를 쏜 활은 어떤 활일까? 또 그 활은 어떤 모양일까? 이런 것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는 어떻게 되겠는가? 마라가야, 그는 알기도 전에 죽고 말 것이다. 마라가야, 세계는 유한 한가 무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인간은 죽은 다음에도 존재 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인생의 괴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괴로움을 소멸시켜야 한다. 마라가야,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은 대로, 설한 것은 설한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괴로움이다[苦]’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集]’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滅]’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道]’라고 나는 설했다. 왜 나는 그것을 설했는가? 그것은 열반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은 마치 코끼리의 발자국이 다른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용하듯이 불교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포괄하는 가르침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교의 모든 교설은 이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에 포함되며 이 가르침은 부처님의 교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포괄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처음 가르침을 펴신 초전법륜(初傳法輪)에서 설하신 진리가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이다. 이 가르침은 진리를 설함에 있어 상당히 논리적이며 실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성제의 구체적 내용은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이다.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연기(緣起)의 이치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중에도 십이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와 괴로움의 소멸인 멸성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므로 사성제는 곧 십이연기를 실천적으로 재조직한 교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 고성제(苦聖諦)

불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다. 그러므로 불교의 총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 교설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현실과 현상의 세계를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한 현실의 판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관찰해 보고는 괴롭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현상의 세계를 괴롭다고 하니 혹자는 불교는 허무주의라고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로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고성제(苦聖諦)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얻어낸 결론이다. 현상세계에서는 즐거움은 잠깐이고 근심, 걱정, 갈등 등과 같은 괴로움은 크고 길다.

 

2) 집성제(集聖諦)

집성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가르침이다. 현실에 대한 여실한 통찰을 통해 현실을 괴롭다고 파악했으므로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절차다. 괴로움이란 연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항상 하지 않고 고정되지 않은 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서로 모이고 쌓여 일어나기에 한 번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하기 마련이다. 그처럼 연기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는 노・병・사의 괴로움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고요히 일체의 경계를 여실히 보시고는 그 원인이 생(生)에 있음을 아셨다. 태어났기에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이 있다고 파악하셨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니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의 생사 윤회하는 테두리인 유(有)에 근원이 있음을 아셨고, 그 원인은 다시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취(取)에 있음을 아셨고, 또 그 원인은 애(愛), 그리고 그 원인은 수(受) ……

.

이렇게 하나하나 그 원인을 고찰해 올라가니, 결국에는 무명(無明)이 생・노・병・사의 근본 원인임을 여실히 아셨다. 이것이 바로 십이연기이며,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한다. 유전문을 일어나는 순서대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한다. 집(集)은 모여서 일어난다는 뜻으로 집기(集起) 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는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므로 십이연기설로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본 것이다.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 해석 방법은 근본불교의 전통적인 해석법이 있으며 부파불교로 오면 이러한 근본불교의 해석 방법에 업(業)과 윤회(輪廻) 사상을 대입하여 삼세양중인과의 업감연기를 통한 해석법이 있다.

 

경전에서는

『그때, 세존은 우주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소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한 번 가부좌를 하신 채 7일 동안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셨다. 그러던 중, 초저녁에 연기를 일어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셨습니다.

 

①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②행(行)이 있고,

행으로 말미암아 ③식(識)이 있고,

식으로 말미암아 ④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으로 말미암아 ⑤육처(六處)가 있고,

육처로 말미암아 ⑥촉(觸)이 있고,

촉을 말미암아 ⑦수(受)가 있고,

수로 말미암아 ⑧애(愛)가 있고,

애로 말미암아 ⑨취(取)가 있고,

취로 말미암아 ⑩유(有)가 있고,

유로 말미암아 ⑪생(生)이 있고,

생으로 말미암아 ⑫노(老), 사(死), 우(憂), 비(悲), 고(苦), 뇌(惱)가 생긴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 이니라』이를 하나하나 알아본다.

 

① 무명(無明)

무명은 밝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지혜가 밝음이라면 밝음이 없는 상태인 어둠은 바로 무지하여 어리석은 상태를 말한다. 무명이란 연기의 진리를 모르기에 실재하지 않는[無我] 일시적[無常]인 존재를 실재하는 것으로 알아 상을 짓고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상태를 말한다. 일체제법의 일시적인 형체를 ‘나다’・‘너다’ 하고 집착하고 분별하며 ‘내 것’ 이다. 라고 집착하여 괴로워하는 상태가 바로 무명이다. 한 마디로 진리에 대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무명은 집착심과 분별심이며 이는 번뇌를 낳는 근본 원인이다. 이로 인해 갖은 악업을 짓고, 그로 인해 괴로움의 업보를 받게 된다. 집착하는 마음에서 탐심(貪心)이 나오고, 분별로 인해서 진심(瞋心)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탐(貪), 진(瞋), 치(癡)가 곧 무명이다.

 

경전(한글대장경『잡아함경』)에서는

『이른바 무명으로 인하여 지어감[행]이 있다면 어떤 것을 무명이라 하는가? 만일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며,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하며, 안팎을 알지 못하고, 업을 알지 못하고, 갚음을 알지 못하며, 업과 갚음을 알지 못하고, 부처를 알지 못하고, 법을 알지 못하며, 스님을 알지 못하고……, 참다운 지혜가 없어 어리석고, 컴컴하며, 밝음도 없고, 크게 어두우면 이것을 무명이라 하느니라.』

 

② 행(行)

이상과 같은 근본무명으로 인해 그것을 연하여 행(行)이 있게 된다. 무명에 의해 집착되고 분별된 대상을 실재화(實在化) 하려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행은 행위를 뜻한다. 이것은 또한 업(業)이라고도 한다. 업은 세 가지가 있음은 앞에서 확인한 바 있다. 즉 몸으로 짓는 행위인 신업(身業), 입으로 하는 행위인 구업(口業), 그리고 생각 ․ 뜻으로 짓는 행위인 의업(意業)이다. 우리가 하는 생각, 말, 행위 하나하나가 모두 그저 흘러가서 없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아뢰야식(제8식)에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로 저장되며, 저장된 종자는 나를 형성하는 힘이 되어 나 자신에게 뿐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현재의 나의 모습은 그저 아무 원인 없이 이런 모습으로 생활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계속해서 해오던 나의 생각, 말, 행위들이 아뢰야식(제8의식)에 쌓이고 쌓여서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나를 보고자 한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를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미래를 바꾸고자 한다면 먼저 지금 현재 이 순간부터 내 생각, 말, 행위를 바꾸어야 함은 당연한 인과법의 이치다. 부파불교에서는 이 연기설에 업(業)사상을 결합하여 삼세양중인과설을 제시하고,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을 전개하였다. 이는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를 거치며, 십이연기 각각의 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윤회・업 사상을 통해 설명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업감연기설에 의하면 무명(無明)과 행(行)은 과거세의 원인이라고 한다.

 

즉 과거에 어리석은 마음[無明]으로 인해 행(行)을 지어 그 행위의 업력에 의해서 이번 생으로 윤회 하여 몸을 받아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무명과 행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을 받았다면, 몸을 받은 뒤에는 업력으로 인하여 식이 생긴다.

 

③ 식(識)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서 안식 등 여섯 가지 식(識)이 있다. 예전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경험이나 행위(行)로 지금 그 음식을 보면 그 음식에 대한 각종의 인식이 일어난다. 전에 보고[眼], 먹고[舌], 냄새 맡았던[鼻] 행이 잠재의식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되어서 지금 그 음식을 보면 예전에 보았던 것을 인식[眼識]하며, 냄새 맡았던 식[鼻識], 먹어보고 느낀 식[舌識]을 떠올려 식 작용으로 이어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

경전(한글대장경『잡아함경』)의 말씀을 인용해 보면,

 

『지어감[行]을 인연으로 하여 식(識)이 있다면 어떤 것을 식이라 하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식이니, 눈의 식[眼識], 귀의 식[耳識], 코의 식[鼻識], 혀의 식[舌識], 몸의 식[身識], 뜻의 식[意識]이니라.』

 

부파불교의 업감연기설에 의하면 과거세의 무명과 행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을 받는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의 행위에 의해 우리의 몸이 형성되면 그곳에 식(識)이 발생한다. 이것은 식별, 인식이라고 해석된다. 몸이 형성되자 우리는 무의식적인 습(習)으로 그곳에 ‘나다’ 하는 아상(我相)을 짓고, 따라서 ‘나다’라는 생각으로 인해 거기에 분별하는 인식작용이 발생한다. 부파불교 업감연기설에서는 인간이 이 생에서 몸을 받자마자 그 업력으로 인하여 몸에 여섯 가지 기관[六根]이 생기고 그 기관에서 제각각의 식별[六識]을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여섯 가지 식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러한 여섯 가지 식이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 몸에서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과,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며 이것을 표현한 것이 십이연기의 네 번째인 명색[육경]과 다섯 번째의 육입[육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식, 명색, 육입은 따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항목은 시간적으로 선후 관계가 아닌 동시적 관계다.

 

④ 명색(名色)

색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인식의 대상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한다. 명색이란 우리의 주관적인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으로 육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육경 중 정신적인 것이라 함은 여섯 번째 의식의 대상인 법경(法境)을 말하는데, 의식의 대상인 정신적인 생각 등을 말한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명색을 오온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즉 색은 물질적인 것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적인 것으로 본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 ‘명・색이 양반인데...,’하는 말이 있다. 이때의 명색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명색, 오온이다. 앞에서 일체를 분류할 때 물질적인 것에 어두운 사람을 위해서 십이처[육근과 육경]로 분류했으며, 정신적인 것에 어두운 사람을 위해 오온으로 분류한 것을 보면, 이는 같은 것의 다른 분류 방법이므로 명색(名色) 또한 어떤 것이라 해도 옳은 것이다. 그러나 십이연기에서는 오히려 오온보다는 육경을 명색으로 정의하는 것이 세 번째 식(識)과 다섯 번째 육입(六入)과 연관 지어 설명할 때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전(한글대장경 『잡아함경』)에서는

『의식을 인연하여 정신과 물질이 있다면, 어떤 것을 정신이라 하는가? 이른바 네 가지 형상 없는 쌓임이니, 즉 느낌(受), 생각(想), 지어감(行), 의식(識)의 쌓임이니라. 어떤 것을 물질이라 하는가? 이른바 사대(四大)와 사대로 된 물질로서 이 물질과 앞에서 말한 정신이니, 이것을 정신과 물질이라 하느니라.』

 

⑤ 육입(六入) 육입은 육처(六處)라고도 하며, 여섯 가지 인간의 주관적 감각기관을 말한다. 앞의 장에서 일체의 구성을 십팔계로 살펴보았다. 앞의 식, 명색, 육입은 바로 이 십팔계(十八界)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일체의 구성요소인 십팔계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이라고 할 것 없이 인간의 주관인 감관[육근 = 육입]과 그 감관에 대응하는 대상[육경 = 명색],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만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인식작용[식]을 나타내고 있다.

 

⑥ 촉(觸)

육입을 연하여 촉이 있게 되는데 이 촉(觸)은 접촉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촉은 여섯 감각 기관인 육근과 그 대상인 육경이 만나는 것이지만 단순히 육입이 육경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접촉으로 인해 육식이 일어나는 것까지를 말한다. 다시 말해 식, 명색, 육입이 서로 화합하는 작용을 바로 촉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성유경』에서는 근(根), 경(境), 식(識)의 세 가지 요소가 모여서 촉(觸)을 만든다고 한다. 이를 삼화성촉(三和成觸)이라고 한다.

 

이를 『아함경』에서는

『여섯 감관을 인연하여 닿임[觸]이 있다면, 어떤 것을 닿임이라 하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촉신(觸身)이니 눈의 닿임, 귀의 닿임, 코의 닿임, 혀의 닿임, 몸의 닿임, 뜻의 닿임이니라.』 집성제(集聖諦)-3[십이연기]

 

⑦ 수(受)

수는 감수작용(感受作用)으로 느낌을 말한다. 식 ․ 명색 ․ 육입이 서로 만나게[觸] 되면, 그 다음으로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 하는 느낌[受]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수, 즉 느낌이다. 수에는 삼심수(三心受)라 하여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수(苦受)라고 하여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느끼는 괴로운 느낌이고, 둘째로, 낙수(樂受)라고 하여 즐거운 느낌을 말하며, 셋째로, 사수(捨受), 혹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라고 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그저 그런 느낌이다.

 

경전에서는『닿임(촉)을 인연하여 느낌(受)이 있다면, 어떤 것을 느낌이라 하는가? 이른바 3수(受)이니 괴로움의 느낌, 즐거움의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니라.』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제12권

 

부파불교의 삼세양중 업감연기를 알아본다. 앞에서 무명과 행이 과거세의 두 가지 원인이 되었음을 말했는데, 그러면 그 과거세의 두 가지 인의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현재세의 결과로 식, 명색, 육입, 촉이 그것이다. 과거세에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해 업[行]을 지었고, 그로 인해 현세에 인간의 감각기관이 생기고[六入], 그에 따른 대상이 생기며[名色], 그 두 가지가 만나 인식작용[識]이 일어나게 된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지는 작용을 촉(觸)이라고 한다.

 

이렇듯 네 가지는 현재세의 결과라고 한다. 이를 시간적으로 따져 본다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식(識)이란 처음으로 어머니의 태속에 들어가는 단계이며, 명색(名色)은 아이가 어머니 태속에 있을 때 심신(心身)이 점차로 발육하기는 해도 아직 오관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와 같은 것이고, 육입(六入)은 심신이 완전해서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 의 여섯 가지가 모두 갖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촉(觸)은 어린 아기가 출생한 후 외계에 접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후 두세 살까지는 육근으로 육경과 접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현생을 살아가며, 죽기 전까지는 항상 식, 명색, 육입, 촉의 작용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되므로 위에서의 동시적이란 설명과 함께 이해해야 할 것이다.

 

⑧ 애(愛)

수(受)를 연하여 애(愛)가 발생한다. 애(愛)란 앞서 수(受)에서의 좋고 싫다는 느낌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 좋은 것을 취하려 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즐거움의 대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려는 욕심이므로 욕망, 갈애(渴愛)라고도 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애착심 뿐 아니라, 싫어하는 것에 대한 증오심도 애(愛)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애(愛)를 번뇌 중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수행에도 커다란 장애 요인으로 꼽는다.

 

경전에서는

『느낌을 인연으로 하여 욕망이 있다면, 어떤 것을 욕망이라 하는가? 이른바 세 가지 애(愛)이니 욕심의 욕망, 빛깔의 욕망, 빛깔이 없는 욕망이니라.』 이렇게 세 가지의 욕망(욕계, 색계, 무색계)이 있다.

 

첫째, 욕심의 욕망[욕계(欲界)의 욕망]으로,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욕심을 다 충족시키려는 것이고,

둘째, 빛깔의 욕망[색계(色界)의 욕망]이란 물질을 한없이 갖고 싶고, 이성을 한없이 사랑하고 싶은 욕망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취착(取着)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셋째, 빛깔이 없는 욕망[무색계(無色界)의 욕망]이란 물질도 갖고 싶지 않고, 이성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욕망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 중에는 죽을 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애착심이 있다. 첫째는 자체애(自體愛)라 해서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는 경계애(境界愛)라 하여 사랑하는 사람, 자식, 부모, 재산, 명예 등 내 주위 경계에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며, 셋째로는 당생애(當生愛)라 하여 다음 생에 좋은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애착심이다.

 

⑨ 취(取)

애(愛)를 인연으로 하여 취(取)가 일어나는데 이는 취하고자 하는 행동으로 욕망에 의해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취착(取着)이라고 하여 취하여 집착하는 올바르지 못한 집착을 말한다. 앞의 욕망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심을 말한다. 즉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감각 작용이다. 여기에서는 아상(我相)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취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욕취(欲取)로서 다섯 가지 욕망이다. 재물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과 색, 성, 향, 미, 촉의 다섯 가지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여 갖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로 인하여 ‘내 것이다’라고 하는 소유욕의 아상이 생긴다.

 

두 번째는 견취(見取)로 그릇된 의견, 사상, 학설에 얽매여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쌓여 자기주장만을 옳다고 내세우고 취하려는 욕망이다. 이로 인해 내가 옳다는 아상이 생긴다.

 

셋째는 계금취(戒禁取)로 사람들의 그릇된 행동을 청정하고 올바른 행위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따르려는 것으로서 올바른 계율을 범하려고 하는 욕구를 말한다. 이것은 몸뚱이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몸뚱이를 편하게 하고자 하는 욕구다. 넷째는 아어취(我語取)로 내 견해, 내 말만 옳다고 집착하고 고집하는 것이다. 총체적인 아상을 이르는 말이다.

 

취에 대해 설한 경전을 보면,

『욕망을 인연으로 하여 잡음[取]이 있다면, 어떤 것을 잡음이라 하는가? 이는 네 가지 취이니 욕심의 취, 소견(所見)의 취, 계의 취, 나[我]의 취이니라.』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⑩ 유(有)

취를 인연으로 하여 유(有)가 있다. 유(有)라는 말은 생사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되는 것으로써 업(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집착하여 취하려 하므로 그에 따른 행위로 업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지분에서 나온 행(行)도 업이라고 했으므로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행은 그 원인이 무명이므로 어리석음으로 인해 생기는 보다 근본적이고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이 유(有)는 애(愛)와 취(取)를 조건으로 하여 생기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행은 태초에 처음 무명으로 인하여 한 생각이 일으킨 근본적인 업(業)이며, 유(有)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보편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전에서는

『가짐[取]을 인연으로 하여 존재(有)가 있다면, 어떤 것을 존재라 하는가? 세 가지 존재이니 욕심의 존재(欲界), 빛깔의 존재(色界), 빛깔이 없는 존재(無色界)이니라.』라고 하여 유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계는 아직 욕망이 남아 생사고해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여 윤회하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부파불교의 삼세양중 업감연기에서는 앞의 세 가지 애(愛), 취(取), 유(有)가 현재생의 세 가지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 결과로 미래의 두 가지 결과인 생(生)과 노사(老死)를 초래한다고 하였다. 현재 살아가면서 애착하고 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업[有]을 낳고, 그 업력으로 인하여 다음 생(生)을 받게 되며, 자연히 노, 병, 사(老, 病, 死)의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⑪ 생(生)

유(有)를 인연으로 하여 생(生)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유를 업이라고 했으니 그 업력에 의하여 생(生)을 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앞에서 고(苦)를 설명할 때 노, 병, 사의 근본 원인이 바로 생에 있음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생이 바로 노, 병, 사의 시발점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존재(有)로 인연하여 태어남(生)이 있다면, 어떤 것을 태어남이라 하는가? 만일 이러저러한 중생이 이러저러한 몸의 종류로 한 번 생기면 뛰어넘고, 화합하고, 태어나서 쌓임을 얻고, 계(界)를 얻고, 입처(入處)를 얻고, 명근(命根)을 얻나니 이것을 태어남이라 하느니라.』

 

⑫ 번뇌

생이 있으므로 노(老), 사(死), 우(憂), 비(悲), 고(苦), 뇌(惱)가 있게 된다.

경전에서는『태어남을 인연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면, 어떤 것을 늙음이라 하는가? 만일 털은 희고, 정수리는 드러나며, 가죽은 늘어지고, 기관은 무르익으며, 사지는 약하고, 등은 굽으며, 머리를 떨어뜨리고, 끙끙 앓으며, 숨길은 짧고 숨을 헐떡이고, 앞으로 쏠리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몸은 검누르고, 저승꽃이 피며, 정신은 희미하고, 행동하기도 어려워서 쇠약에 빠지면 이것을 늙음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죽음이라 하는가?

 

이러저러한 중생이 이러저러한 종류로 사라지고 옮기되,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하며 더운 기운이 떠나고, 목숨이 멸하여 쌓임을 버릴 때에 이르면 이것을 죽음이라고 하나니 이 죽음과, 앞에서 말한 늙음을 늙음과 죽음이라 한다. 이것을 연기라고 하느니라.』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인생의 괴로움임을 여실히 보시고 그 원인을 살펴보셨다. 그 결과 궁극의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임을 아셨다. 그러므로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바로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에 근본무명으로 인해 한 생각 잘못 일으킨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끊으려면 밝은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러나 무명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고는 하지만 나머지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모두가 생, 로, 병, 사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십이연기의 지분 중에서 괴로움의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요, 오직 바로 지금의 현실이기에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올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십이연기의 각 지분 중 생, 로, 병, 사를 초래한 세 가지 원인이 가장 현실적이고 우리에게 직접적인 괴로움의 원인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애(愛), 취(取), 유(有)이다. 결국, 괴로움과 고성제의 원인은 애욕과 애욕으로 인해 그 대상에 집착하여 취하려는 취착심,

 

그리고 그러한 애욕과 취착으로 인한 잘못된 행위[有]가 바로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번뇌(煩惱)라고 한다. 번뇌는 결국 집착하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 사견(邪見)으로 인한 어리석은 마음이다. 다시 말해서 탐(貪), 진(瞋), 치(癡)이다. 이러한 번뇌의 근본원인은 무명에 있는 것임을 올바로 일러주는 교설이 바로 십이연기설의 교설이다. 이런 식으로 십이연기의 관찰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이 사성제의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집성제다.

 

3) 멸성제(滅聖諦)

멸이란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으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며, 흔히 열반이라 표현한다. 괴로움의 원인인 온갖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진 상태로 고(苦)가 소멸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최고의 행복, 절대적 행복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멸성제는 사성제 중의 집성제와는 반대되는 경지이다.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십이지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관찰한 것이다. 이를 차례차례로 바른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고 한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도 없고[無無明],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다[無老死]고 한 것은 바로 이 유전문의 이치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근본불교에서는 이렇게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설명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도 없다고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멸성제] 어떻게 하면 될까? 불교는 현상계가 괴롭다고 하여 그 원인을 밝히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은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일 뿐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살펴보면 그 근본 원인인 무명에서부터 차례로 하나씩 지분을 소멸시켜 나가는 환멸문[역관(逆觀)]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노, 병, 사의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생(生)을 멸해야 하고, 생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유(有)를 멸해야 하고, 유를 멸하기 위해 취(取)를 멸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무명(無明)을 멸하면 괴로움의 모든 고리가 풀려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것을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며 이렇게 관찰하여 열반의 상태에 이르는 관법이 바로 역관(逆觀)이다.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는 말은 바로 이 십이연기의 환멸문도 사실은 없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 한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완전한 열반의 경지를 뜻한다.

 

4) 도성제(道聖諦)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 도성제는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준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며 양극단을 떠난 길이다.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아니고,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길이다.

 

『소나경』은 이러한 중도에 대한 좋은 비유를 들려주고 있다.

『"소나야, 너는 집에 있을 때 비파를 잘 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파 줄을 너무 강하게 죄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비파 줄을 아주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그와 마찬가지로 노력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의 동요를 가져오고, 너무 느슨하면 나태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나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나 존자는 세존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거문고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하면 좋은 소리가 날 수 없고, 가장 좋은 소리를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 또한 극단적인 상태를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이며, 팔정도의 정(正)이 바로 중도의 중(中)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리불의 옛 친구가 물었다.

 

『"사리불이여, 왜 세존과 함께 청정한 수행을 하는가?"

"벗이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길은 있다. 그 길은 팔정도이니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그것이다."』

 

(1) 팔정도(八正道)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

정견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나다' 하는 아상이 없이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이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불교의 진리인 연기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사성제의 진리를 여실히 보는 것을 말한다. 정견은 나머지 일곱 가지 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궁극인 지혜의 견해라 하겠다.

 

②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정사는 바른 생각과 바른 사유로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생각할 것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을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가 미리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르게 되어있음을 뜻한다. 바른 생각을 통해 바른 행동, 바른 말, 그리고 바른 생활이 나오기 때문이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

바른 구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을 행하지 않고 진실 되고 부드러워 화합하는 것이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이란 거짓말<잘못된 말인 망어(妄語)>, 아부<아첨하는 말인 기어(綺語)>, 이간질하는 말인 양설(兩舌), 욕설 등의 험악한 말인 악구(惡口)를 뜻한다. 삼업(三業) 중 구업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

정업은 바른 신업(身業)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한 행위를 말한다.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업에도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있다. 유루의 업은 번뇌가 있는 행위라는 뜻으로, 아상에 기초한 행동이며 탐 ․ 진 ․ 치 삼독심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는 업을 말한다. 무루의 업은 아상이 모두 사라져 번뇌가 소멸되고 탐 ․ 진 ․ 치 삼독심을 벗어난 행위이므로, 이것은 과보를 받지 않는 수승한 행위이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 바른 직업

정명은 몸으로는 청정한 행위를 하고, 입으로는 청정한 말을 하고, 뜻으로 청정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십선업(十善業)을 닦는 생활을 의미한다. 정사유, 정어, 정업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생활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올바른 생활을 통해 올바른 의, 식, 주를 영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진은 노력한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실천해 가는 힘이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 정진해서는 안 되며, 정진은 항상 선한 것을 바르고 둥글게 키워나가기를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관찰

올바른 통찰, 관찰이라는 의미로서 신체의 움직임이나 좋고 싫은 느낌, 마음의 온갖 분별,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잘 관(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본불교의 핵심적 수행방법인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며 요즈음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이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선정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으로 평상시 산란하고 복잡한 번뇌・망상과 분별심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집중력이다. 마음을 순일하게 하여 삼매(三昧)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정신집중을 의미한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이므로 이 둘을 합해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의 참선도 이 정정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사마타(Samatha)이다.

 

(2) 삼학(三學)

이상에서 살펴본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것을 돕는다. 따라서 팔정도는 계, 정, 혜 삼학을 중도설에 입각하여 세분하여 구체화한 것이다.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戒)를 의미하며, 이러한 계행을 통한 올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정(定)으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세 가지가 그것이다. 이러한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밝은 지혜를 증득할 수 있으니 이것이 혜(慧)이며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여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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