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내고향

호근동 포제에 대하여

hognmor 2010. 2. 2. 20:57

호근동 포제.hwp

 

 

 

1. 마을 개황


• 위치

호근동은 서귀포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사이에 있는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 북쪽에는 한라산 줄기가 뻗어 내려와 우뚝 솟은 학수(각시)바위가 마을을 지켜 서있고, 서쪽에는 고근(궁)산이 하늬바람을 막아주어 겨울을 포근하게 지낼 수 있게 해준다. 마을 동쪽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르형분화구인 하논이 있어 벼농사가 이루어졌고, 남쪽으로는 외돌개에서 속골에 이르는 해안 절벽을 따라 가장 아름답다는 올레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 지형

호근마을 바닷가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백록담의 세 부악(釜岳)과 <새통어이> 깊은 계곡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인다. 마을 북쪽에는 백록담에서 남쪽으로 급경사면 중간에 시오름이 앉아있고 그 아래로 완경사면 끝자락에 각시바위(학수암)와 고근산(고궁산)이 우뚝 서있다. 마을은 바닷가까지 경사지를 이루고 있어 불칸동산, 솔왓동산, 상뒤동산, 막동산, 유리왓동산과 같은 동산이란 지명이 널려 있고, 외돌개에서 속골 사이의 갯바위는 높은 절벽(기정)을 이루고 있어 한라산 분출 용암이 우리 마을을 따라 빠르게 바다로 흘렀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형성된 지역이다 보니 마을 주민들은 메와진돌, 벤돌, 거문머들과 같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돌투성이인 밭이고 면적이 좁은 밭인 돌렝이나 계단식 밭인 살레(찬장의 제주어)왓(밭의 제주어)을 일구어 농사지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 역사

호근동은 예전에는 호근머들(好近磊)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호근마을 서당 훈장을 지낸 허은(許垠)의 호근록(好近錄,1927)에 따르면 好近마을의 好(좋을호)는 虎(범호)가 바뀐 것이고, 원래 호근마을은 큰가름(수모루에서 서남쪽으로 법환리 사이의 지명)에 있었으므로 범섬에 가깝다는데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점차 큰가름(큰마을)과 이웃한 통물, 원통, 너분이왓, 염돈 등의 조근가름(작은마을) 주민들이 어우러져 지금의 호근마을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호근록은 조선개국 3년(1394)에 고려 말 정당문학을 지낸 조원이 현 서호새마을금고 인근에 터를 잡아 그 8세손에 이르러 망하니 양천허씨가 장가들어 그 터에 살았다고 쓰고 있어 호근마을의 설촌 시기를 짐작하게 한다. 1707년 3월에 만든 차일장입참책록(遮日帳入參冊錄=장례식장막계참가자명부)에 차일장에 참여한 마을 주민 51명의 성씨를 보면 金씨 17명, 高씨 8명, 許씨 6명, 吳씨 5명, 玄씩 5명, 康씨 3명, 韓씨 2명, 肖씨와 奴씨, 洪씨, 李씨, 宋씨가 각각 1명으로 나타나 당시의 주민 분포를 짐작하게 한다. 호근마을은 1892년 주민들 간의 불화로 호근리와 신호근리로 분리되었다가 1900년에 합쳐졌으나 1903년 또다시 분리되었는데 위로는 바가잣도에서 아래로는 통물까지를 경계로 동쪽은 호근리, 서쪽은 서호리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 신앙

제주도에는 당5백 절5백이라고 했다. 제주인의 삶은 무속과 불교를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 호근동 옛 주민들도 무속과 불교를 믿으며 살아왔고 조선조 숭유정책에 힘입어 유교식 마을제인 포제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마을의 지명 가운데 절곡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마을에 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지금 마을에 있는 절집들(봉림사, 용천사, 영산사)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편이다. 절에 비해 당은 역사가 꽤 깊은 편이다. 호근마을의 본향당인 요(여)드레당은 서호초등학교에서 남쪽 500m지점에 있다. 가까이에는 삼싱물(삼신물=샘 이름)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마저 없다. 이 당 뒤쪽에는 일렛당을 따로 모시고 있다. 본풀이에 따르면, 이 당의 신인 하로산또는 사냥을 하며 <시오름>에서 <고근산>으로 내려와 보니, 고근산에는 세 신선이 앉아 바둑장기를 두고 있었다. 하로산또가 말을 하되, "앞 마을이 어디우꽈?" "호근리가 되어진다." "그 디 좌정할 수가 이수과?" 하니 세 신선은 좌정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 신(하로산또)은 풍수지리에도 능통한지라 지남철(=나침판)을 띄워 좌정처를 찾으며 <마풀림동산 → 큰당동산 → 붉은밭 → 삼싱물>에 당도해 보니, 물이 좋아 삼싱물은 벼룻물로 쓸 만하고, 통물은 목욕물, 말을 먹일 물로 충분하였다. 그래서 '돌혹' 검북(풍개)나무 아래 좌정처를 정하여 살며, 슬하에 여덟 딸아이를 낳아 길렀다고 한다. 그 딸들이 제주도 곳곳에 좌정하여 당신이 되었다고 하니 호근마을이 설촌된 시기가 다른 마을들보다 앞섰음을 짐작하게 한다.

 

 


2. 포제 준비


• 유래

주례(周禮=유교경전)의 ‘춘추제포(春秋祭酺)’조에 포(酺)는 재해를 내리는 귀신으로 마을의 안녕과 집안의 평안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한다. 호근동 포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유교식으로 포제가 행하여지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에 향교가 세워진 이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천지신령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려 마을과 가문의 번영과 안녕을 빌고 불의의 재난을 막아보려고 마을의 뒷동산에 제단을 마련하고 유교식으로 해마다 정월 초에 정일(丁日)을 택하여 포제를 봉행하여 왔다.


• 준비

해마다 연초에 마을회장은 향회를 소집하여 포제일과 제청을 정하고 제관을 선발하며 제물을 준비하게 된다.

포제일은 매년 음력 정월 상정일(上丁日)을 택하는데 혹 마을에 초상 등 부정한 일이 생길 경우 중정일(中丁日)로 옮기고 또다시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하정일(下丁日)로 순연하게 되는데 정월을 넘길 경우에는 그해의 포제는 지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제주 역사에서 최대 비극인 4∙3 사건 때에는 3월 상정일(上丁日)에 포제를 지낸 특별한 사례도 있다.

옛날에는 제청을 포제단 아래 풀로 집을 짓고 제관들이 합숙하면서 제수를 준비하여 포제를 지내오다가 4∙3 사건 이후에는 마을에 정숙한 가정을 골라 제청으로 삼고 입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가급적 포제단에 가깝고 새로 지은 집을 제청으로 선정하고 있다. 제청이 정해지면 제청으로 지정된 집 올래에는 왼새끼로 꼬아 귤잎을 듬성듬성 끼워놓은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게 된다.

제관 선정은 헌관은 덕망이 있는 웃어른 가운데서 뽑는데 초헌관만은 포제일의 일진과 생기에 맞는 분으로 선정하고 그 밖의 제관은 마을의 문중별로 고루 분포하도록 기혼자로 선정한다. 서기 2000년(庚辰年) 호근동 포제헌관제집사방(酺祭獻官諸執事榜)에 올린 제관을 보면 다음과 같다.

 

 

 

 

 

 

 

 

 

 

 

 

 

 

 

 

 

 

 

 

 

 

 

 

 

 

 

 

 

 

 

西

 

 

 

 

 

 

 

 

 

 

 

 

 

 

 

 

 

 

 

 

 

 

 

 

 

 

 

 

 


포제 봉행에 필요한 제비는 1960년대까지는 가구당 쌀 1되를 거두어 마련하였으나 1970년대부터는 쌀로 받던 것을 돈으로 환산하여 거두다가 1980년대부터는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제청에 들려 제비로 바치는 성금을 마을회 예산의 포제 경비로 편성하여 집행하고 있다.

포제 때에 제관들이 입는 제복은 예전에는 마을 주민들의 도복을 빌어서 입었으나 근래에 마을회에서 제복을 일괄 구입하여 관리해오고 있다. 포제에 사용할 제물의 종류와 수량은 한지 전지에 기록하여 착오가 없도록 하였는데 호근동 포제물건기는 다음과 같다.

 

 

 

 

 

 

 

 

 

 

 

 

鹿醢

녹해

(소고기)

芹菹

근저

(무)

魚醢

어해

(생선)

形鹽

형염

(소금)

魚蘇

어소

(생선)

橘甘

귤감

(귤감)

栗黃

율황

(밤대추)

鹿脯

록포

(소고기)

稷米

직미

(흐린조)

黍米

서미

(모인조)

粱米

양미

(흐린쌀)

稻米

도미

(모인쌀)

壹刀

壹刀

壹刀

壹刀

參尾

壹刀

壹刀

參脡

壹刀

壹刀

壹刀

壹刀

 

豕腥

시성

(돼지)

笏記紙

홀기지

(창호지)

羹藿

갱곽

(미역)

甘漿

감장

(간장)

麯子

국자

(누룩)

酒米

주미

(감주쌀)

飯米

반미

(메쌀)

祝紙

축지

(창호지)

幣帛

폐백

(면직물)

(양초)

(향가지)

菁菹

청저

(미나리)

壹口

參張

參條之

壹刀

伍刀

壹斗

壹斗伍刀

壹張

壹雙

壹封

壹刀

 

 

 

 

 

 

 

 

 

 

 

 


• 입제

호근동 포제는 입제에서 파제까지 다음과 같은 일정으로 진행된다.

포제를 봉행하는 정일을 기준으로 4일 전에 입제에 들어간다. 마을회관에 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선정된 제관들의 역할을 알리는 헌관제집사방과 포제에 쓰일 제물들의 물목을 적은 제물건기를 작성하여 초헌관과 마을 어른들의 확인을 받게 된다. 헌관제집사방과 포제물건기를 쓰는 일은 집례 또는 대축의 몫이다. 이어서 제관들은 몸을 청결히 하기 위해 함께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선정된 제청에 모여 합숙을 하면서 포제 봉행에 따른 각자의 직분과 역할을 익히고 실천해나가게 된다. 이때부터 마을 주민들은 시간을 내어 제청에 들려 제관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성금을 내고 서로 덕담을 나누다가 돌아가게 된다.

입제 둘째 날은 집례는 홀기문을 작성하고 전사관은 제물을 준비하며 대축은 축문을 작성하게 되는데 헌관은 미비한 사항이 없는지 점검을 하게 된다. 제청에서는 제관과 제청에 들린 주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게 되는데 제청의 안주인과 부녀회원들이 음식 장만을 맡고 있다.

입제 셋째 날은 아침 새벽(6시)에 식사를 하고 집기와 제물을 모두 챙겨 포제단으로 이동을 한다. 사람들이 활동하기 전에 일찍 이동함으로써 혹시나 있을 부정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포제단에 도착하면 제관들이 머물 천막과 음식을 장만할 정지(부엌)를 설치한다. 이어서 희생(흑돼지)을 장만하게 되는데 끓는 물을 부어 털을 깨끗이 제거하고 제단에 올릴 소량의 털과 피, 간을 날채로 쟁반에 담아둔다. 점심식사를 한 후 포제단 정리 작업과 전등 설치 등 포제봉행을 위한 준비를 한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예행연습을 하여 제관들이 각자의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제관 모두가 제복을 입고 포제물건기에 맞게 제물이 준비되었는지 확인하고 진설도에 맞추어 제물을 올릴 위치를 점검하고 집례의 홀기문에 맞추어 포제 봉행의 전과정을 빠짐없이 살펴보게 된다.



3. 포제 봉행


• 세수

밤 11시가 되면 모든 제관은 깨끗한 물로 몸을 청결히 한다. 예전에는 포제단 근처에 흐르는 냇물에서 너무나 차가워 고통스러운 전신 목욕을 하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냇물이 말라버려서 물통에 담아간 물을 데워서 세수를 하는 형편이다. 세수(목욕)를 한 다음 제관 모두가 제복으로 갈아입는다.


• 진설

밤 11시 30분이 되면 제관 모두가 모인 가운데 대축이 포제물건기를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가는데 맞추어 전사관은 해당되는 제물이 빠짐없이 준비되었음을 확인한 다음 준비된 제물을 포제단으로 운반하여 진설을 하게 된다. 제물을 진설할 때에 포지지신 제단 위에는 하얀 종이를 깔고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는데 진설할 위치를 정한 진설도는 다음과 같다.

 

 

 

酺地

神位

 

 

 

鹿鹽 녹염

(절인소고기)

魚鹽 어염

(절인해어)

黍米 서미

(좁쌀밥)

 

稻米 도미

(쌀밥)

魚蘇 어소

(생선)

鹿脯 녹포

(소고기)

菁菹 청저

(미나리)

芹菹 근저

(무)

稷米 직미

(흐린조밥)

 

粱米 량미

(흐린쌀밥)

鹽 형염

(소금)

栗黃 율황

(밤대추귤)

 

 

 

幣帛 폐백

(옷감)

 

 

 

燭 촉

(초)

豕 시

(돼지머리)

 

 

 

羔 고

(돼지후각)

燭  촉

(초)

 

 

 

祝 축

 

 

 

 

 

爐 로

 

香 향

 

 

 

盞 잔(初)

 

盞 잔(亞)

 

盞 잔(終)

 

조육(희생을 장만할 때 쟁반에 담아두었던 털,피,간)은 포지지신 제단 앞 가운데에 있는 홈에 올려놓고, 동7위와 서8위에는 메와 갱, 갈비, 채소, 과일 등을 기본으로 진설하고 여분이 있으면 더 올린다. 포지지신 제단에 올린 메(밥)에는 억새 줄기를 한 뼘 정도로 잘라 만든 젓가락을 꼽고 동7위와 서8위에는 숟가락을 메에 꼽고 젓가락은 채소 쟁반 위에 올려놓는다. 관세할 물과 수건도 다음 제관위치도를 보고 준비해 놓는다.


 

 

 

 

 

 

제단

 

 

 

 

 

 

 

<西贊>

 

 

 

 

 

 

 

 

 

<大祝>

 

<東贊>

 

서찬

 

 

<奉爐>

 

 

 

 

 

<奉香>

대축

 

동찬

 

 

 

<奠爵>

봉로

 

 

 

 

 

봉향

<奉爵>

 

 

<執禮>

 

西

8

전작

 

 

 

 

 

 

 

봉작

7

 

집례

 

 

 

 

 

 

 

 

 

 

 

 

 

 

 

 

 

 

 

 

 

 

 

 

 

 

 

 

 

 

 

 

 

 

 

 

望燎位

 

 

 

 

 

 

 

 

 

盥洗位

 

 

 

망료위

 

 

 

<初獻官>

 

<亞獻官>

 

<終獻官>

 

관세위

 

 

 

 

 

 

 

壇 南 拜 位

<謁者>

 

 

 

 

 

 

 

 

알자

 

 

 

 

 

 

 

 

 

 

 

 

 

 

 

 

 

 


• 봉행

밤 12시가 되면 제의를 봉행하게 되는데 이 절차를 정해 놓은 호근동 포제홀기문을 기준으로 제의 봉행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사관은 제물진설도에 맞추어 진설을 한 후 초헌관의 확인을 받은 다음 전사관과 집례, 동서찬이 먼저 4배를 한다.


謁者引獻官以下俱就門外位(알자는 초헌관과 제관 내빈을 안내하여 모두 문 밖에 서시오)

謁者引祝及諸執事者入就壇南拜位(알자는 축관 및 모든 집사를 단남 아래 배위에 들어오도록 인도하시오)  

四拜, 祝以下皆四拜(4배를 행합니다, 대축이하 네 번 절하시오)

詣盥洗位盥洗各就位(대축과 모든 집사는 손을 씻은 다음 각자 위치로 가시오)

謁者引獻官入就拜位(알자는 헌관을 절할 자리로 안내하시오)

謁者進初獻官之左白有司謹具請行事(알자는 초헌관의 좌측으로 가서 준비가 되어 행사를 진행하겠다고 <行事>라고 아뢰시오)

四拜(사배를 행합니다)

獻官皆四拜(헌관 모두 네 번 절하시오)


◈ 行奠幣禮(초헌관이 전폐례를 행하겠습니다)

謁者引初獻官詣盥洗位北向立(알자는 초헌관을 관세위로 안내하여 북향하여 서게 하시오)

搢笏(홀을 가슴에 꽂으시오) 盥洗(관세하시오) 執笏(홀을 잡으시오)

引詣神位前北向跪(신위 앞으로 가서 북향하여 꿇어앉게 인도하시오)

搢笏(홀을 가슴에 꽂으시오) 三上香(헌관은 향을 세 번 올리시오)

(봉로와 봉향은 제단 위에 있는 향로와 향을 헌관 앞에 내려놓고 헌관이 3상향을 한 후 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獻幣(헌관은 폐물을 올리시오)

(봉향은 제단 위에 있는 폐물을 헌관에게 드린 후 받아서 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執笏(홀을 잡으시오) 俯伏興平身(엎드렸다 일어서시오)

引降復位(안내하여 내려와 처음 자리에 서게하시오)


◈ 行獻爵禮(헌작례를 행하겠습니다)

謁者引初獻官詣樽所(알자는 초헌관을 준소로 안내하시오)

西向立(서향하여 서시오) 酌酒(술을 따르시오)

引詣神位前北向跪(신위 앞에 안내하여 북향하여 무릎을 굻게 하시오)

搢笏(홀을 가슴에 꽂으시오) 獻爵(잔을 올리시오) 執笏(홀을 잡으시오)

俯復興(엎드렸다 일어나) 少退跪(조금 뒤로 물러나 무릎을 꿇으시오)

祝進神位之右東向跪(축은 신위 오른쪽에 앞으로 가서 동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으시오)

讀祝(축을 읽으시오)

(봉향은 제단 위에 있는 축문을 내려 대축에게 드리고, 참석자 모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다)

俯伏興平身(엎드렸다가 일어서시오, 모두 일어선다, 대축은 축문을 제단 위로 올리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引降復位(알자는 헌관을 단 아래 처음 자리로 안내하시오)


◈ 行亞獻禮(아헌례를 행하겠습니다)

謁者引亞獻官詣盥洗位北向立(알자는 아헌관을 관세위로 안내하여 북향하여 서게 하시오)

搢笏(홀을 가슴에 꽂으시오) 盥洗(관세하시오) 執笏(홀을 잡으시오)

引詣樽所西向立(아헌관을 준소 앞으로 안내하여 서향으로 세우시오)

酌酒(술을 따르시오)

引詣神位前北向跪(안내하여 신위 앞에 북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시오)

搢笏(홀을 꽂으시오) 獻爵(잔을 드리시오) 執笏(홀을 잡으시오)

俯伏興平身(엎드렸다 일어서시오) 引降復位(단 아래 처음 자리로 안내하시오)


◈ 行終獻禮(종헌례를 행하겠습니다)

謁者引終獻官詣盥洗位北向立(알자는 종헌관을 관세위로 안내하여 북향하여 서게 하시오)

搢笏(홀을 가슴에 꽂으시오) 盥洗(관세하시오) 執笏(홀을 잡으시오)

引詣樽所西向立(아헌관을 준소 앞으로 안내하여 서향으로 세우시오)

酌酒(술을 따르시오)

引詣神位前北向跪(안내하여 신위 앞에 북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시오)

搢笏(홀을 꽂으시오) 獻爵(잔을 드리시오) 執笏(홀을 잡으시오)

俯伏興平身(엎드렸다 일어서시오) 引降復位(단 아래 처음 자리로 안내하시오)


◈ 行分獻禮(분헌례를 행하겠습니다)

謁者引亞終獻官各詣無祀鬼神位前立(알자는 아헌관과 종헌관을 무사귀신위 앞에 서게 하시오, 아헌관은 서8위 앞에, 종헌관은 동8위 앞에 가서 선다)

執事者以盞酌酒授獻官(집사들은 잔에 술을 따라 헌관에게 드리시오)

獻官搢笏(헌관은 홀을 꽂으시오)

執盞奠盞以次奠(잔을 받아 계속 올리시오, 봉향, 봉로, 봉작, 전작이 술을 따라 헌관에게 드린 후 올리는 것을 반복한다)

執笏(홀을 잡으시오) 引降復位(단 아래 처음 자리로 안내하시오)

 

◈ 行飮復受禮(제사음식을 음복하는 예를 행하겠습니다)

執事者詣樽所以爵酌福酒(<전작>은 준소에서 잔에 복주를 따르고)

持俎進減神位前俎肉(<봉로>는 그릇을 갖고 가서 신위 앞에 있는 고기그릇에서 고기를 조금 덜어내시오)

謁者引初獻官升詣飮復位(알자는 초헌관을 음복할 자리로 오르도록 안내하시오)

西向跪(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으시오) 搢笏(홀을 꽂으시오)

執事者北向以爵授獻官(<전작>은 북향하여 술잔을 헌관에게 드리시오)

獻官受爵飮卒爵以授執事者(헌관은 잔을 받아 복주를 모두 마시고 <전작>에게 건네시오)

執事者受虛爵(<전작>은 헌관에게서 빈잔을 받으시오)

執事者以俎授獻官(<봉로>는 고기그릇을 헌관에게 드리시오)

獻官受俎以授執事者((헌관은 고기그릇을 받아 안주를 먹고 고기그릇을 <봉로>에게 건네시오)

執事者俎降(<봉로>는 고기그릇을 받아 제자리에 내려놓으시오)

自東階門出(대축과 봉향, 봉로, 봉작, 전작 모두 동쪽계단으로 나가시오)

執笏(헌관은 홀을 잡으시오) 俯伏興平身(엎드렸다가 일어서시오) 引降復位(제자리로 내려가 서시오)


◈ 行四拜禮(사배례를 행합니다)

獻官皆四拜(헌관 모두 사배를 하시오)

撤籩荳(철변두를 행합니다)

祝進撤籩荳(축은 가서 그릇들을 치우시오)

四拜(사배를 행합니다: 헌관과 재위자 모두가 4배를 하는데 헌관이 먼저하고 재위자들이 나중에 한다)

獻官皆四拜(헌관 모두 사배를 하시오, 사배가 끝나면 동8위 바깥쪽으로 가서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순으로 선다)

在位者皆四拜(제례에 오신 분은 모두 사배를 하시오)


◈ 行望燎禮(망료례를 행합니다)

謁者引初獻官詣望燎位北向立(알자는 초헌관을 안내하여 신을 보내는 자리에 북향하여 서게 하시오)

搢笏(홀을 꽂으시오)

祝以篚取祝板及幣降(대축은 축문과 폐백을 내려서) 自西階置於坎(서쪽 섬돌 아래 구덩이에 놓고) 可燎(태우시오)

謁者進初獻官之左白禮畢遂(알자는 초헌관 죄측으로 가서 모든 예가 끝났다고 <禮畢>하고 아뢰시오)

引獻官出(헌관을 밖으로 인도하시오)

祝及諸執事俱復壇南拜位(축과 집사 모두 제단 아래 절할 자리에 서시오)

四拜(사배를 행합니다)

祝以下皆四拜(축이하 집사는 모두 사배를 하시오)

以次出(밖으로 나가시오) 끝으로 전사관과 집례, 동서찬이 4배를 하는 것으로 제례는 모두 끝난다.



4. 전승 과제


마을제(포제)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을 마을의 수호신인 포지지신의 조화로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포제를 봉행하였겠지만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 그런 믿음으로 포제를 봉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본다. 포제를 봉행하는 동안 청년회원들은 포제를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에 집기와 제물을 옮기는 일을 맡고 부녀회원들은 제청을 방문하는 주민과 제관들에게 음식을 장만하여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며칠에 걸쳐 시간과 경비를 들이면서 앞으로도 포제를 봉행해야하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인바, 포제 때에 마을 구성원 대부분이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는 데서 포제는 마을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서로 얼굴을 익히고 대화하고 놀이와 식사를 함께 하는 가운데 마을공동체가 하나로 뭉쳐 유지될 수 있게 해주는 유익한 기능이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 마을 포제를 단순한 미신이라거나 특정한 종교와 관련된 의식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비롯된 올림픽과 같은 축제로 승화시켰을 때 우리 호근 마을 공동체가 자손만대 이어져가게 하는 구심체가 되지 않을까?

 

- 참고문헌 -


우리고장의 설촌유래. 서귀포문화원. 2009.

서호교 50년. 서호초등학교총동창회. 2002.

호근동 포제 홀기문. 호근동. 1940.

호근동 포제 기록. 호근동. 2000.

 

호근동 포제 기록. 호근동. 2009. 

호근동 포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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