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

부처님의 가르침 해설

hognmor 2016. 12. 1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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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입장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초기경전에서는 왕왕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진리는 현실에 드러나는 것이고, 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가까이 이끌어 들이는 것이며, 현명한 이라면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한다는 입장에서의 여실지견(如實知見)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세상에 나왔든 나오지 않았든 이 진리는 영원한 것으로서 나는 그것을 스스로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고 사람들을 위해 열어 보이고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그 진리를 당신도 깨달아서 알아냈듯이 제자들도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주는 입장에 있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법문(法門)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문은 글자 그대로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란 의미로, 초기불교 이래 계속 써온 단어이다. 따라서 불교를 공부하려면 스스로 깨우쳐 알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초기불교에서는 무작정의 믿음을 요구하기보다 그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청정심(淸淨心)만을 요구했다.

 

그러면 부처님은 과연 어떤 입장에서 자신의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일까. 먼저 당시의 다양한 종교사상들을 숙명론(宿命論)과 유신론(有神論),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으로 나누어 각각의 주장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셨다. 예를 들어 숙명에 의해 이 세상사가 결정되는 것이라면 살생(殺生) 등을 저질러도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행위를 한 것조차 숙명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의 의지에 의해 이 세상이 돌아간다거나, 아무런 원인과 조건이 없이 이루어진다는 주장 역시 그 사람의 행위가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거나 아무런 원인과 조건 없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되므로 행위자에게 죄를 물을 수 없어 결코 옳은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입장이었다.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의지가 있어 그로부터 선악 등을 판단할 근거가 나온다는 것인데, 당시 바라문교의 계급제도와 관련해서도 태어난 출신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 귀천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윤회를 결정한다는 업에 대해서도 자신의 신분에 따른 마땅한 도리가 아니라 행위의 옳고 그름에 따라 좋은 곳에 태어나기도 하고 나쁜 곳에 태어나기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계급제도에 반대하여 불교교단에서는 아무런 계급적 차별 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였으며, 남존여비의 차별이 대단히 심했던 당시 사회에서 여성출가자도 용납했던 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석가모니부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이나 정신상태, 처해진 환경 등을 고려해 그때그때 적절한 가르침을 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수의설법(隨宜說法) 또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더불어 상대편의 이해력을 점진적으로 개발시켜 마침내 진리를 깨닫게 한다는 입장에서 방편시설(方便施設)이라는 말도 쓴다. 원어로 보면 방편이란 '접근한다'는 뜻이고 시설은 '알아내게 한다'는 뜻이어서, 결국 부처님의 목적은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지 자신의 가르침에 무작정 따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초기경전만을 보아도 대단히 다양한 교설들이 별다른 체계 없이 이리저리 뒤섞여 나오는 것처럼 보이고 그 분량 또한 상당한 양에 이르는데, 위와 같은 불교의 입장이 나올 수 있었던 근본교의에 대해 이 자리에서는 몇몇 주요개념들을 중심으로 개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불교에서 가르치는 세계의 구조

 

먼저 불교의 세계관에 대해 살펴보자. <아함경(阿含經)> 등 초기경전을 보면 석가모니부처님은 세상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일체(一切)란 무엇인가를 말씀하신다. 예를 들면 '일체는 십이처(十二處)' '일체는 십팔계(十八界)' '일체는 오온(五蘊)이다' "일체는 십이인연(十二因緣)이다' 하는 식이다. 말하자면 일체라는 말로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설명한 것인데, 십이처를 예로 들어 보겠다.

 

부처님은 '일체는 십이처로, 그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단언하셨다. 십이처의 처()'들어간다'는 뜻으로, 십이처란 12가지 분류 정도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12가지는 눈()` ()` ()` () ` ()` ()6가지 인식기관(六根)과 형태()` 소리()` 냄새()` ()` 촉감()` 사물()이라는 6가지 인식대상(六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 세계라는 것이 결국은 우리 눈에 보이는 빛깔과 형태,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 등 우리의 인지능력 안에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말씀인데, 사실 현실에서의 우주만유와 삼라만상이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그것들은 결국 우리의 인식영역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간혹 다른 종교들에서 초월적 존재들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실재한다는 증거는 없다. 그저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서만 등장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한때 정통종교의 사제인 바라문(婆羅門)에게 이렇게 반문하신 적이 있다. '모든 것을 통달했다는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브라흐만 신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브라흐만 신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십이처에서 특이한 것은 인식기관과 인식대상 각각의 여섯 번째인 마음과 사물이다. 우리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토대로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그때 생각하는 기관을 마음이라고 본 것이고, 생각 속에 떠오르는 여러 사물이 그 대상이 된다. 마음이라는 인간의 정신활동은 대체로 인지()와 감정(), 의지()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별히 십이처에서는 의지가 마음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의 대상은 적절한 어휘가 없어 앞에서는 그저 사물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불교에서 사물, 존재, 진리, 가르침 등 여러 의미로 쓰이는 법()이다. 인도의 옛말 다르마(dharma)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이 사물을 가리킬 때는 특별히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나타내는 '필연성을 지닌 것'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십이처에서 인식주체가 되는 6가지 인식기관은 그대로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인식객체인 6가지 인식대상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을 가리키는데, 요약하자만 주체적이고 주관적인 인간의 의지와 그를 둘러싼 조건에 따라 필연적인 결과를 수반하는 자연환경으로 이루어진 것이 십이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불교의 세계관인 것이다.

 

두 번째로 십팔계에 대해 살펴보자. 십팔계의 계()란 종류 내지 구성요소라는 뜻으로, 세계를 이루고 있는 18가지 요소가 십팔계의 의미이다. 그 십팔계는 십이처인 눈` ` ` ` ` 마음과 형태` 소리` 냄새` ` 촉감` 사물에 인식기관 각각의 식별()을 보탠 것이다. 즉 눈의 요소(眼界) 등과 형태의 요소(色界) 등에 눈의 식별의 요소(舌識界)` 귀의 식별의 요소(耳識界)` 혀의 식별의 요소(舌識界)` 몸의 식별의 요소(身識界)` 마음의 식별의 요소(意識界)를 가리킨다. 이것은 앞서 십이처가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으로 세계를 한정한 것에 비해 식별이라는 정신작용을 보탠 것이다. 말하자면 눈과 눈에 보이는 대상인 형태 등으로만 우리의 인식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겠지만, 실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기보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왜냐하면 과거에 보아둔 것에 대한 주관적 판단이 기억되었다가 비슷한 것이 보이면 거기에 선입견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별의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불교의 세계관은 보다 심리적으로 심화되고 있는데, 역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관찰의 태도가 돋보이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 오온(五蘊)에 대해 살펴보자. 부처님은 '일체는 오온으로 그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은 물질()` 느낌()` 생각()` 작용()` 식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앞서 십팔계의 분석을 보다 심리적으로 심화시킨 것이다. 우선 오온의 온()이란 본래 '근간(根幹)'이란 의미로, 오온은 세상을 이루는 5가지 근간 정도의 뜻이다. 부처님은 당시의 견해에 따라 모든 물질은 지()` ()` ()` ()의 사대(四大)라는 요소가 각기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계셨는데, 십이처에서의 인식기관과 그 대상이 물질적인 형체라면 인간과 자연은 그 물질이라는 것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물질만이 인간의 전부가 될 수는 없으니 그런 물질에는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을 바탕으로 거기에 인간의 사유작용인 느끼고 생각하고 작용하고 식별하는 정신적인 기능을 보탠 것인데, 이것은 특히 개체를 지속하려는 인간의 생명활동에 주안점을 둔 분류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세상이란 것이 우리의 인식영역 안에 한정된 것이라면 기실 그것은 물질적인 요소와 더불어 인식을 기점으로 그에 수반되는 정신작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느낌()이란 감수 내지 인식작용을 의미하고, 생각()이란 그 인식에 의한 표상작용을 의미하며, 작용()이란 그런 표상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의지나 그것에 집착하는 경향성을 의미하고, 식별()은 십팔계에서 설명했듯이 그것들을 내재화하고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잠재의식을 의미한다. 아무튼 크게 보아 이 세상을 물질과 정신의 세계로 분류한 것인데, 특히 오온을 가지고 인간 존재를 가리킬 때는 오취온(五取蘊)이라는 말을 별도로 사용한다. 오온이 하나의 개체로 취착(取着)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온과 오취온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오온에 탐욕이 있는 것이 오취온이라 할 수 있다'고 경전에서는 설명된다. 각설하자면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생명현상이라는 측면에서 특별히 정신에 중점을 두면서 관찰하고 있는 것이 오온의 가르침이다.

 

3.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속성

 

그러면 이와 같은 십이처나 십팔계, 오온 등으로 분류해볼 수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을까. 석가모니부처님은 그것들이 모두 무상(無常)` ()` 무아(無我)라고 단정하셨다. 예를 들면 '물질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며 괴로운 것은 무아이다. 느낌, 생각, 작용, 식별 또한 그와 같다'고 초기경전에 줄기차게 설해지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무상과 고, 무아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우선 무상이란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로, 인간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처럼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생겨나() 머물다가() 변해서() 사라져가게() 된다. 우리들은 이 변치 않는 진리를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현실에서는 늘 잊고 산다. 그때그때 눈앞에 놓인 대상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그래서 백년이나 천년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앞에 놓인 재물이나 권력, 명예를 영원할 것처럼 본다. 탐욕이나 인색, 교만은 이런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평생 남에게 제대로 된 선심 한번 못써보고 깊은 회한 속에 생을 마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다음에 무상한 것은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감각을 괴로운 것()과 즐거운 것(),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3가지(三受)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입장에서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늘 자유롭고 건강하고 부유하고 싶은 우리의 염원과 다르게 현실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인생을 괴로움으로 정의하는 이 가르침을 토대로 불교를 염세적인 종교라고 판단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 괴롭다는 가르침은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자는 입장이지 결코 그 괴로움에 매몰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탈이나 열반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먼저 눈떠야 할 것으로서의 현실의 괴로움인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괴롭기 때문에 무아라고 가르친다. 글자 그대로 하면 내()가 없다()는 말인데, 여기서 먼저 저적해두어야 할 것은 무아의 아는 본래 바라문교에서 자아의 본질로 여기던 아트만(atman)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현상적인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에게 변하지 않는 실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이다.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내 몸과 내 생각에 집착한다. 그러다보면 어릴 때부터 성장하여 점차 늙어가고 있는 이 몸이므로 당연히 그 어디엔가 나의 영속성을 유지해주는 무언가의 실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체 내에서는 각각의 세포들이 끊임없이 새로 분열하고 사멸하며 나의 몸이라는 전체적인 현상이 변화해가고 있을 뿐, 그 안에 이것이 반드시 나의 몸이라 할 수 있는 실체란 없다. 또한 나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번 먹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고집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사실 생각이라는 것도 상황에 따라 조건 지어진 것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의 실체 내지 본질이라면 영원히 변치 않아야 하고 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어야 하지만, 무상하고 괴로우므로 실체 내지 본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제자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자주 반복하고 계신다. "물질은 무상한가 무상하지 않은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괴로움이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것이 나의 것(我所)이고 이것이 나()라고 할 수 잇을까? "할 수 없습니다." "느낌과 생각, 작용, 식별도 또한 그러하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인 양 집착하고 그런 아집에 의해 대립과 반목 등 괴로운 문제들을 발생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무아의 가르침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라문교의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바라문교에서는 우주의 창조이자 본질인 브라만과 자아의 실체인 아트만이 같다는 범아일여의 깨달음에서 인생문제의 해결을 기대했지만, 불교에서는 그런 아트만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육체는 눈에 보이듯 영원하지 않지만 영혼은 영원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믿는 그 영혼이라는 것이 부정되고 잇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세계 어느 종교나 철학과도 대비되는 특유한 것이 되었다. 사실 불교의 입장에서 종교라는 것이 있다면 불교라는 종교와 불교 이외의 종교들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로 부처님 당시에도 이 가르침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 여러 가지로 오해를 사는 일이 많았다. 초기경전에서도 그런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데, '일체 작용이 무상하고 일체의 사물이 무아라면, 이 가운데 어떤 내가 있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는가' 하는 반문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트만이 없다는 가르침은 나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나를 찾으려는 기초작업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 나타날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은 '진리에 의지하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고 가르치셨으며, '자기 자신 한 사람을 이기는 것이 백만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위대한 승리'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또한 도망간 도둑을 찾기 위해 숲속을 정신없이 헤매던 일행을 만나 '도망간 사람을 찾는 일과 자기 자신을 찾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시급한가' 하고 물으셨던 일화도 초기경전에는 등장한다.

 

4. 불교의 핵심사상 연기의 세계관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이유로 무상` ` 무아라는 속성을 띠게 되었을까. 부처님은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원리를 연기(緣起)라는 가르침으로 해명하셨다. 연기란 '()하여 결합해서 일어난다(pratiyasamutpada)'는 뜻인데,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연기된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고 괴로우며 무아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연기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가르침인지 단계를 밟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연기로 설명되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인과(因果)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흔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일정한 원인()이 있어야 일정한 결과()가 나타난다. 콩을 심었는데 거기에서 팥이 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일이 모두 그렇듯이 어느 것도 단일한 인과만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콩을 심었다 할지라도 거기에 수분이나 햇빛, 적당한 온도 등의 조건이 제공되지 않으면 콩이 나지 않는다. 이처럼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이 함께 작용하여 세상은 이처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원인과 조건, 즉 인연(因緣)이라고 한다.

 

한편 만물은 인과와 인연의 법칙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하지만, 개개의 사물들은 다시 서로가 서로를 의존해서 존립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식이 있으려면 아버지가 있어야 하지만, 다시 아버지는 자식이 있어야 아버지인 것과 같다. 또한 어떤 것이 짧은 것이 되려면 상대적으로 긴 것이 있어야 하며, 긴 것은 짧은 것이 있어야 길다고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상의상자(相依相資)라고 하는데, 초기경전에서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아무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거대한 천체에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로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하면서 우주의 신비스럽고 오묘한 현상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이 세상 만물은 무상하지만 덮어놓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과와 인연, 상의상자가 그런 것이다. 따라서 무상한 속에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고 있어, 각자의 존재에는 그런 법칙이 머물고 있다는 의미로 경전에서는 법주(法住)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또한 모든 존재는 그런 법칙을 요소로 해서 성립한다고 볼 수도 있는데, 경전에서는 그 뜻을 법계(法界)라고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존재에는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고 있고 그 법칙이 존재의 성립근거라 할 수 있으므로, 불교에서는 그 존재 내지 사물들은 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앞에서 살펴보았던 일체(一切)를 다른 말로 모든 법이란 의미의 제법(諸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존재 속에 상주하는 법칙성을 법성(法性)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법성은 어떤 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생멸변화 하는 모든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일체의 존재와 그 생멸변화에 일관하는 법성이 아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 법성을 일체의 존재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일체 존재의 생멸변화에 그런 법칙성이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법성과 존재는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무아를 설명하면서 무아를 설한 참뜻은 참다운 자아를 찾기 위한 기초작업이라는 말을 했는데, 참다운 자아의 실체 내지 본질이란 바로 무상한 가운데 상주하는 이 법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앞에서 설명한 일체의 구조나 그 속성 그리고 인과와 인연, 상의상자, 법성 등이 초기경전에서 밝히는 모든 존재의 실제 모습, 즉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법성에 대한 앎을 불교에서는 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러한 명이 없는 상태를 무명(無明)이라고 하는데, 무명으로 말미암는 사람들의 존재양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십이인연(十二因緣) 내지 십이연기(十二緣起)라는 가르침이다. 경전에서는 무명으로 말미암아 작용()이 일어나고, 작용으로 말미암아 식별()이 일어나며, 다시 식별로 말미암아 관념과 물질(名色)이 일어나는 식으로, 이어서 6가지 인식기관(六入)` 접촉()` 느낌()` 좋아함 ()` 가짐()` 존재()` 태어남()이 차례로 일어나는 까닭에 마침내 늙고 죽는 근심과 슬픔, 고통과 번뇌(老死優悲苦惱)가 나타난다고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본래 이 십이인연을 처음에는 거꾸로 사유하여 모든 연결고리의 궁극에 무명이 있음을 발견하셨다고 한다. 다시 말해 '무엇 때문에 늙고 죽는 근심과 슬픔, 고통과 번뇌가 있는가,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있는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하는 식인데, 이렇게 보는 것을 역관(逆觀)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무명으로 인해 작용이 있고 하는 식으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고 하는데, 경전에서는 이 십이연기에 대한 역관과 순관을 통해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다고도 한다.

 

5. 불교의 수행원리와 중도설

 

아무튼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관찰들을 통해서 불교의 수행은 궁극적으로 무명을 없애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와 같은 수행의 이론이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이미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를 대상으로 한 초전법륜에서도 설해진 것이었다. 그것은 괴로움에 관한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발생에 관한 진리의 내용이다. 인생에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위시하여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며(愛別離),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求不得) 괴로움이 있다. 그래서 오온(五蘊)에 취착하는 개체, 즉 일반적으로 올바른 지혜가 없는 인간 삶(五取蘊)은 괴로음 그 자체라는 것이다.

 

또한 괴로움의 발생에 관한 진리는 그 괴로움이 아무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연기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앞서 십이인연을 설명하면서 무명이 있어 마침내 늙고 죽는 근심과 슬픔, 고통과 번뇌가 있게 된다고 하였는데, 그런 과정이 괴로움의 발생에 관한 진리인 것이다.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진리는 괴로움이 발생한 원인을 없애면 괴로움이 사라지는 상태가 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말하자면 괴로움 자체가 연기된 것이므로 그 조건들을 없애면 괴로움은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로 이르는 길에 관한 진리에서는 괴로움을 소멸시킬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는데, 팔정도(八正道)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바른 견해(正見)` 바른 정진(精進)` 바른 기억(正念)` 바른 명상(正定)인데, 여기에서 바르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초전법륜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먼저 당신은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그저 순간순간의 쾌락을 몸에 맡기고 살아가는 일반 범부들이나 해탈을 이루겠다고 스스로의 몸을 혹사시키며 고행하던 사문들의 태도를 함께 부정한 것이 중도인데, 중도에는 그 이외에도 더욱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수행의 성과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아 고민하는 제자에게 부처님은 현악기의 비유를 들어 중도를 설명하신 적이 있다. 현악기의 현을 알맞게 조절해야 제 소리를 내는 것처럼 수행도 너무 서두르거나 너무 나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도의 보다 깊은 의미는 다른 데 있다. 앞에서 무아를 설명하면서 당시에도 무아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가 있어 '일체 작용이 무상하고 일체의 사물이 무아라면, 이 가운데 어떤 내가 있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는가'라고 반문한 경우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 대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세간(世間)의 발생()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고, 세간의 소멸()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여래는 두 끝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 여기서 세간이란 일체나 세계와 같은 말로, 무아(無我)라고 할 때의 그 아()에 해당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잘못된 생각에 의해 연기된 것으로서, 그런 세간이 발생하는 측면에서는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소멸하는 측면에서는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는 그 나는 무명을 바탕으로 연기된 나이다. 무아의 가르침에서는 그렇게 연기된 나까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있다() 없다()는 양극단을 떠난 중도의 입장에서만 올바로 알 수 있는 것이 무아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런 중도의 입장은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 등의 문제에 대한 판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철학에서도 '신이 존재하는가 아닌가'에 대해 '신이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신이 없다는 견해를 반박할 수 없고 신이 없다는 증거를 가지고 신이 있다는 견해를 반박할 수 없어 판단을 중지한다'는 입장이 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취한 태도가 바로 그와 비슷한 것으로서 일단은 이분법적인 판단을 중단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양자를 모두 갈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팔정도에서의 바르다는 기준은 이와 같은 중도인 것이다.

 

이야기를 다시 팔정도로 돌아간다면 이와 같은 중도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출가자로서의 삶을 올바르게 영위하고 올바르게 정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른 기억이란 이 세상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인 것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가장 쉽게 이해하는 무상이라는 현실에 대해서도 우리는 늘 까먹고 지낸다. 그래서 탐욕 등이 나타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것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바른 기억이다. 그리고 바른 명상 또한 그런 사실들에 정신을 집중하는 수련이다. 팔정도의 항목들은 언어로만 따지면 비교적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출가의 전문수행자들에게만 권해졌던 수행덕목이고, 석가모니부처님도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라고 경전을 통해 말씀하신다.

 

한편 불교의 수행법을 계()` (), ()의 삼학(三學)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계는 재가의 신자들도 지키는 오계(五戒)를 의미하는데, 남을 해치지 않고(不殺生)`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지 않으며(不偸盜)` 음란하지 않고(不邪)` 거짓말 하지 않으며(不妄語)` 음주 등으로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는(不飮酒) 생활을 가리킨다. 물론 재가자의 오계와 출가자의 오계는 그 엄격함에 차이가 있지만, 항목은 일단 일치한다. 그리고 정은 팔정도에도 나오는 명상수행을 가리키고, 혜는 지혜를 기르는 것이다. 앞서 기술한 불교의 여러 교설들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세상의 이치에 대해 스스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성취하는 수행이 혜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 해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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