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

12연기에 대한 해설

hognmor 2016. 12. 11. 21:02



12 연기에 대한 쉬운 해설.hwp

12 연기에 대한 쉬운 해설


반야심경의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12연기가 다 공한 것임을 설하는 내용입니다.


12연기란 결국 불교의 기본인 '인과법因果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과법은 아시다시피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라는 쉬운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 있다', '안방에서는 시어미 말이 옳고, 부엌에서는 며느리 말이 옳다'라는 측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과를 낳은 과정에 보이지 않는 다른 속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원인이 곧 바로 다른 요인 없이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다른 결과를 보인다는 뜻입니다. 요즘 유행어로 '그때그때 달라요'란 말입니다.

 

원인()+과정()=결과() 결과(새로운 )+과정(다른 과정)=결과(또 다른 결과) 이렇게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벼농사를 지을 때 볍씨를 파종하고(), 모내기와 농약주기()를 해야 좋은 쌀을 수확하고() 그 수확한 좋은 볍씨로 다음해 다시 뿌려(이때의 =), 또 수확을 하는 과정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농약을 뿌려야 하는데 실수로 제초제를 뿌리면 농사를 망칠 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 과정()이 원인()이 되어 엉뚱한 결과()가 되어 버릴 수도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과정을 생략한 인과법은 자칫 원인에 이미 결과가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宿命論에 빠질 수가 있는데, 이는 불교에서 무척 경계하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이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이 12연기 입니다.

 

잡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12연기를 들어 보시겠습니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때, 혼자 고요한 곳에 앉아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었다. '세상에는 들어가기 어렵다. ···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생···사와 그것이 의지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었다. '무엇이 있어 생이 있고 무엇을 인연하여 생이 있는가? 그러다가 마침내 참다운 지혜로써 알게 되었다. , 존재가 있기 때문에 생이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 그러면 무엇이 있어 존재가 있고, 무엇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는가?

 

그렇다, ()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으며,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다. 취는 사물에 맛들이고 집착하여 돌아보고 생각하여 마음이 거기 묶이면, 애욕이 더하고 자라나게 된다. 그 욕망이 있기 때문에 취가 있고, 또 욕망을 인연하므로 취가 있다.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노··사와 근심과 괴로움이 있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인다. 등불은 기름과 심지를 인연하여 켜지고 기름과 심지를 더하면 오래가게 된다.

 

그와 같이 사물을 취하고 맛들이고 집착하며 돌아보고 생각하면 욕망의 무더기는 더하고 자라난다. 그때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없어야 노··사가 없어질까?' 그렇다, 생이 없으면 노··사도 없을 것이다.

 

존재가 없으면 생도 없다. 취가 없으면 존재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욕망을 떠나 마음을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음이 묶이지 않으면 욕망도 곧 멸할 것이다. 그 욕망이 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존재가 멸하고, 존재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사와 걱정 근심과 괴로움도 멸한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하는 것이다. 기름과 심지로 등불을 켜는 것이므로 기름을 더하거나 심지를 돋우지 않으면 등불은 얼마 가지 않아 꺼지고 말 것이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은 덧없이 생멸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여, 욕망을 끊어 버리고 마음이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않고 묶이어 집착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괴로움의 무더기로 멸해 없어질 것이다."  

 

 

깨달은 자만이 무명을 안다

 

'어리석음이란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이다' 어느 철학자의 일갈이 아니라 제가 만들어 본 말입니다. 아마 이 말이 무명에 비교적 접근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본 서적 중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에 있는 기발한 어리석음을 소개합니다.

 

입대를 앞두고 신체검사를 받는 동안 예비 병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종이들을 집어들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군의관은 청년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생각하고 징집 면제 확인서에 서명을 했다. 그 확인서를 받아본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거야!”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 저자 : 마티아스반복셀 /출판사 : 휴먼앤북스 p.21 "발견" 중에서)

 

이런 유머는 어떻습니까? 어느 날 일본 과학자들이 땅속으로 50m를 파고들어가 작은 구리조각을 발견했다. 이 구리조각을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일본은 고대 일본인들이 이미 2,500년 전에 전국적인 전화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당연히 중국정부가 발끈했다. 중국 정부에서는 과학자들에게 그보다 더 깊이 파볼 것을 종용했다. 100m 깊이에서 중국 과학자들은 조그만 유리조각을 발견했고, 곧 고대 중국인들은 3,500년 전에 이미 전국적인 광통신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 보도에 한국 과학자들은 격노했다. 한국 과학자들은 200m 깊이까지 땅을 파고 들어갔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한국 과학자들은 고대 한국인들이 5,500년 전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경우의 공통점은 어리석음을 '커버'하려다 결정적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것인 듯합니다

 

무명無明은 불법을 잘 모르는 것, 자신의 마음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부처님과 같은 성품(중생의 마음 그 자체의 성품이 더 정확합니다)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어리석음에 이어지는 작용 중 행

 

이제부터는 이 무명이 원인이 되어'어떠한'과정을 거쳐'어떠한'결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시 확인하면 반야심경의'무명진 내지 무노사'를 설명하는 것이 12연기를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12연기에서 무명 다음은 행입니다.

행은 다음 단계인 식을 일으키게 하는 중간 전달의 어떤'작용'을 뜻합니다. 식에 대해서는 골치 아플 정도로 언급을 했으니 문젯거리가 아닙니다만, 행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아 조금 생각을 하셔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행을 업이라고 단정적으로 해설해 놓은 책들이 있어 걱정이 됩니다.

 

행은 그 스스로 업이 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업이란 개념은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쓰는 것인데, 행은'깨닫지 못한데서 갖게 되는 생각()'을 들게 하는 과정 혹은 그 흐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물욕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대화면의 PDP TV를 구입할리 없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고급 오디오나 CD를 구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든 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 그런 사람 봤어'한다면, 그 사람이 바보이거나 아니면 봤다는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닐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쓸모없는 물건을 구입하게 된 다른 연유를 찾으시는 게 오히려 옳으실 겁니다.

 

이제 제가 든 예가 타당하다고 전제를 하고 설명을 드리자면 욕심도 비교할 대상과 상대가 있어야 일어나는 것이 틀림없는데, 그러자면 무엇인가 '인식'이 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매개체가 행이라 말씀드릴 수 있는데 다시 다른 쪽으로 설명을 시도하면 우리의 상식과 생활 규범, 규칙 또는 가치, 더 나아가 우리의 생각을 한정시키는'무엇'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주 간단한 예를 다시 들어 보겠습니다. 무인도에 남자 혹은 여자들만 떨어져있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남자들은 정력 자랑하고 침 튀기며 군대 얘기 할, 한 술 더 떠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를 해댈 이유가 없을 것이고 여자들은 시어머니와 남편 흉보기에다 군것질은 무엇이 좋은지를 이야기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알아야 할'() 동기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 소멸될 수도 있는 동기를 행이라 합니다. 물론 세상살이에 그'경우'란 것이 거의 없을지는 몰라도, 또 내가 마음을 닦으면 식을 일으키는 동기자체가 점차 사라지기는 하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현재의 내가'안다'는 것은 그 '경우''과정''동기'가 분명한 것입니다. 이렇듯 12연기의 행이란 무명에서 다음 단계인 식을 이어주는 그 어떤'과정''작용'을 말합니다.

 

 

행에 이어지는 작용인 식

 

무명에서 어렵게 행을 거쳐 식에 이르렀습니다. 식은 이미 진력나게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할 말이 있습니다. '모르는 것'도 식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모른다는 생각을 갖는 게 바로 식의 작용입니다.

더군다나 모르는 것을'무명'이라고 착각하면 불교 공부는 그 자리에서 끝입니다. 무명은 성욕이 왜 일어나며 화는 왜 내는지, 그 본마음을 모르는 게 무명이지 '성욕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게'무명이 아닌 것입니다. 어릴 때는 성욕이 무엇인지 몰라도 남자라면 사춘기 때 자고 일어나 축축해진 팬티를 보고는 , 이게 성욕이구나.’하고 알게 되는데 이걸 무명이라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모른다.’안다.’의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식'의 작용 중 하나이기 때문에 바로 지금 설명하는 12연기의 식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종교는 종교를 이해시키려는 나름의 용어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경우 '세례', '안식', '휴거' 등 사전을 찾아보아야 하는 단어들은 오히려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오히려 일상용어와 같이 쓰는'축복', '은혜'처럼 간단해 보이는 용어들이 실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는 유교와 더불어 한국민의 역사 속에 너무나 밀착되고 녹아 있어서(이런 자만심이 한국불교를 망치고 있지만)도리어 그 용어의 진의가 곡해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무학無學이라는 말도 불교에서는'배운 적이 없다'가 아니라'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가 맞습니다.

 

12연기의 식역시 단순히'안다'의 개념 아니라 '안다, 모른다는 생각 그 자체', 인식의 작용을 일컫는 용어로 쓰는 것입니다.

 

 

식에 의해 이어지는 명색名色

 

명색名色은 식이라는 분별과 인식작용에 의해 비로소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혹은 물질적 존재를 말합니다. 아주 철저한 유식파唯識派의 주장대로라면 내가 인식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외부에 실존하는 것은 없습니다. 탁자의 예쁜 꽃도 내가'볼 때'만 존재하고, 밤하늘의 달도 내가 바라보고 ', 달이구나'라는 식을 일으킬 때만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내 시야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다가 내가 고개를 돌려 인식할 때만 존재 한다는 것인데, 그 내 생각 때문에 '있게 되는' 존재를 명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명색은 인식의 작용이 가져다주는 허상이지 존재의 실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거 말도 안 된다. 아니, 눈앞에 보이는데도 실체가 없다니 모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바로 그래서 공이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유형, 무형의 것들은 무명과 행을 거쳐 식에 이르러 '착각'과 그릇된'인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실체는 없는데 실체가 있는 것으로 단정한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으로 집착하게 되는 것 말고, 실제 눈앞에 있는 것도 실체를 모르고 집착하게 된다는 뜻이고 그 실체를 바로 보는 게 공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백화점에 가니 아주 마음에 들어 꼭 사고 싶은 옷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 옷은 특정한 색깔과 질감, 모양 등이 총체적으로 조화되어 우리에게 사고 싶은 '인식'이 들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은 실 한 가닥 한 가닥으로 천을 이루고 그 천은 어떤 패턴으로 잘리고 이어져 멋진 옷이라는 형태를 갖춘 것입니다.

 

그 시작과 과정과 결과 어디에도'실체가 멋있는 옷'이란 것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에 따라 멋지다는 느낌을 가질 뿐입니다. 그러니 그 멋진 옷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고의 '해체적 방법'을 추론해 들어가면 옷이란 존재 자체의 실재가 허황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재'의 문제는 철학적으로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만, 불교라는 종교의 사상적 이해는 물론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서도 절대적인 문젯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키 워드'인 공이 바로 이 연기緣起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고, 이 연기란 것은 결국 실재實在에 관한 바른 인식(정견正見)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불법은 실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는 마음의 훈련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기회에 서양적 실존의 개념에 물들어버린 우리에게 안성맞춤인 경전의 한 대목을 소개해드립니다. 반야심경의 명색을 설명하고 있다고 여기셔도 됩니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가까이 가서 공손히 예배드린 다음 다정하고 정중하게 인사말을 나누고 예의 바르게 한편에 비켜 앉았다. 나가세나 존자도 답례로서 왕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밀린다 왕은 나아가세나 존자를 향하여 질문을 시작했다. 존자는 어떻게 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까. 그대의 이름은 무어라고 합니까.

 

대왕이여. 나는 나가세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의 동료 수행자들은 나가세나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는 나에게 나가세나(龍軍), 또는 수라세나(勇軍), 또는 비라세나(雄軍), 또는 시하세나(獅子軍)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대왕이시여 이 나가세나라는 이름은 명칭 호칭, 가명, 통칭(通稱)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인격적 개체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밀린다 왕은 5백 명 대중과 8만 명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가세나 존자는 이름 속에 내포된 인격적 개체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지금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향하여 질문했다. 나가세나 존자여. 만일 인격적 개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대에게 의복과 음식과 방석과 질병에 쓰는 약물 등의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또 그것을 받아서 사용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계행戒行을 지키는 자는 누구입니까. 수행修行에 힘쓰는 자는 누구입니까. 수행의 결과 열반에 이르는 자는 누구입니까. 살생殺生을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남의 것을 훔치는 자는 누구입니까.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거짓말을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술을 마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5역죄를 짓는 자는 누구입니까. 만일 인격적 개체가 없다고 한다면, 도 죄도 없으며, 선행 악행의 과보果報도 없을 것입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설령 그대를 죽이는 자가 있더라도 거기에 살생의 죄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대 승단에는 스승(和尙)도 수계사受戒師도 구족계具足戒도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대는 나에게 말하기를 `승단의 수행 비구들은 그대를 나가세나라 부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나가세나라고 불리는 것은 실체가 무엇입니까. 나가세나 존자여, 머리카락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대왕이여,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몸에 붙은 털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톱, 살갗, , 힘줄, , 뼛골, 콩팥, 염통, 간장 ,늑막, 지라, , 창자, 창자막, , , 담즙, , 고름, , , 굳기름(脂肪), 눈물, 기름(), , 콧물, 관절액(關節滑液), 오줌, 뇌 들 중 어느 것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들 전부가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나가세나 존자는 그 어느 것도, 그것들 전부도 모두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가세나 존자여, 물질적인 형태()나 감수작용()이나 표상작용()이나 형성작용()이나 식별작용()이 나아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 존자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들 색, , , , 식을 모두 합친 것(五蘊)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5(五蘊) 밖에 어떤 것이 나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 존자는 여전히 `아니'라고 또 대답했다. 존자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어 보았으나 나가세나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나가세나란 빈 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있는 나가세나는 어떤 자입니까. 존자여, 그대는 `나가세나는 없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때 나가세나 존자는 밀린다 왕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대왕이여, 그대는 귀족 출신으로 호화롭게 자랐습니다. 만일, 그대가 한 낮 더위에 뜨거운 땅이나 모랫벌을 밟고 또 울퉁불퉁한 자갈 위를 걸어 왔다면 발을 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산란하여 온 몸에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도대체 그대는 걸어서 왔습니까 아니면 탈것으로 왔습니까. 존자여, 나는 걸어서 오지 않았습니다.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대왕이여, 그대가 수레를 타고 왔다면 무엇이 수레인가를 설명해 주십시오. 수레채()가 수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굴대()가 수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퀴()나 차체(車體)나 차틀(車棒)이나 멍에나 밧줄이나 바큇살()이나 채찍()이 수레입니까. 왕은 이들 모두를 계속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합한 전체가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이것들 밖에 수레라는 것이 따로 있습니까. 왕은 여전히 아니라고 대답했다. 대왕이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어 보았으나 수레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수레란 단지 빈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타고 왔다는 수레는 대체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그대는 수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전 인도에서 제일가는 대왕이십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거짓을 말씀했습니까. 이렇게 물은 다음 나가세나 존자는 5백 명 대중들과 8만 명 비구들에게 말했다. 밀린다 왕은 여기까지 수레로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수레인가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했을 때 어느 것이 수레라고 단정적인 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대들은 대왕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5백 명 대중들은 환성을 지르며, 왕에게 말했다. 대왕이여, 말씀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에게 다시 말했다. 존자여,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수레는 이들 모든 것, 즉 수레채, 굴대, 바퀴, 차체, 차틀, 밧줄, 멍에, 바큇살, 채찍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반연(攀緣)하여 수레라는 명칭이나 이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왕께서는 수레라는 이름을 바로 파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나에게 질문한 모든 것, 즉 인체의 33가지 유기물과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반연하여 나가세나라는 명칭이나 이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기막힌 문답식의 대화는 밀린다왕문경에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경의 성립 배경을 살펴보면, 그리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 인도를 침략하여 점령한 후 그리스로 대표되던 서양의 철학과 문화가 인도의 불교 사상과 문화와 접촉하게 됩니다.

 

그 당시의 세계 역사에는 뒤의 로마의 기독교 박해와 공인 등의 갈등이나 힌두교와의 갈등, 이슬람교와의 투쟁 등과 같은 심각한 '충돌'은 전혀 없었습니다. 불상佛像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침공한 그리스의 신을 조각해 놓는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간다라 지방에서 불교 미술이 시발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실제로 초기의 불상들을 보면 완전히 얼굴이 서양인의 모습이라 아주 거북하게 느껴집니다.

 

밀린다왕문경의 두 주인공인 밀린다왕은 기원전 2세기 서양 철학으로 무장한 뛰어난 사상가이자 총명한 논쟁자이며 인도 서북부 펀자브 지역을 통치했던 메난드로스로 추정되고 있고, 나가세나 비구도 실존 인물로 여겨지기에 흥미롭습니다. 이 침략자 밀린다왕과 피지배자인 나가세나 비구는 3일 동안 약 236개의 주제에 대해 논쟁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서양식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불교에 대한 도움이 되는 보기 드문 경전이니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2연기의 명색은 이쯤 해 두겠습니다..

 

 

명색에 의해 이어지는 육입六入

 

육입六入은 육처六處라고도 부르는데, 명색을 안·····(육근)를 통하여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여섯 가지 받아들임의 작용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색·····(육경)을 설명할 때, 여기서의 법은 불법佛法이나 진리의 법이 아니라 '생각을 일으키는 대상으로서의 무형의 것'을 법이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앞 페이지로 가서 다시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명색名色을 수용하는 단계인 육입의 명이 바로 실체는 없지만 생각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는 것이고, 은 생각을 일으키는 대상으로서의 물질적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설명하는 육입은 무형, 유형의 자성自性이 없는 대상을 내가 임의로 가치를 부여해 마음으로 도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누누이 그 자성 없는 실체를 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받아드릴 것(자성)이 없음에도 우리는 무명에서 행을 통해 식을 일으키고, 다시 식에 의한 명색에 집착하여 육입에 이르는 것이 됩니다. 만약 내 마음 바깥의 자성 없는 실체들을 애초부터 공하다고 인식하거나 행, , 명색 중 어느 단계에서라도 그 중 한 가지만 공함을 확고히 한다면 육입은 사실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12연기는 존재와 존재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으로 일어나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노사老死에 이른다는 과정의 설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12연기의 '실체' 역시 공하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계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공에 대해 말하면서, 이 책 내내 공자가 쓰여지면 그것이 다 공에 대한 설명이라고 했던 말씀도 기억하셔야 반야심경을 '놓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 육입 중 하나만 잘못되어도 다음과 같은 얘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도 곤드레만드레 되어 돌아온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간 줄 알았더니 마루에서 마당에 대고 소변을 누는 게 아닌가. 10여 분이 지났는데도 그냥 서 있었고, 20분이 지나도 서 있기에 부인이 소리쳤다 아니, 뭐하고 서 있는 거예요?” “술을 많이 먹었더니 소변이 끊어지질 않아.” “그 소리는 빗물 내려가는 소리예요!”

 

 

육입에서 이어지는 욕망들

 

''은 육입이라는 받아들임을 통해 바깥의 느낌이 내 안에 확고히 인식되어, 그냥 있던 마음과 드디어 접촉하게 되는 단계를 말합니다. 촉이란 글자에 현혹당해 신체적 접촉을 연상하시면 안 됩니다. 내 마음 바깥의 대상이 육입을 통해 내 마음과 교감작용을 불러일으켜 생각을 계속 이끌어내고 그 결과 행동에 이르게 되는 것인데, 이 촉은 대상이 생각에 침투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촉에 이은 ''는 촉으로 침투된 감각을 완전히 받아들여 그 감각을 기준으로 즐겁다() 혹은 괴롭다()라는 인식을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즐거운 것이라 생각하면 추구하려고 시도하고 괴로운 것이라 생각이 들면 피하려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이구나 하는 '별 볼일 없는 결정'도 포함됩니다. 실질적인 욕망을 실현하려는 아주 위험한 단계인 것입니다.

이때라도 '는 공한 것인데'라고 느껴야 조금이나마 마음의 수행이 된 것입니다. 수에서 다음 단계인 ''까지 넘어가면 돌이키기 힘들기 때문에 가능하면 여기에서 마음을 멈추어야합니다.

 

12연기의 무명---명색-육입-, 다음은 ''입니다. 재미없는 설명을 하려니 저도 지루한데 다행히 '건수'를 만났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애를 골칫덩어리로 간주하는데, 고대 인도의 성전聖典'리그베다'나 후대 힌두교에서는 애를 우주의 성립과 존재의 원동력으로 여깁니다.

인도의 힌두사원이나 아잔타 석굴의 적나라한 '섹스신'의 부조나 '카마수트라'란 섹스 지침서 등도 사실은 신과 인간을 교감시키는 정서적인 애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저는 그 흔한 인도 성지순례를 갈 생각이 없어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섹스 하면 또 밀교密敎를 연상하시는 분이 있는데, 밀교 중에서도 한 부파인 좌도밀교에서 성적 결합을 통한 해탈의 실현을 부분적으로 염두에 두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힌두교나 밀교나 여러분이 생각하는 외설적인 행위를 그대로 종교에서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데 어느 정도의 차이인지를 절묘한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도 해외 여행시 공항에서 적는 신고서가 한글과 영어로 되어 있는 줄은 아실 겁니다. 이름(Name), 이렇게 말입니다. 그 중에 남녀를 구분하는 성별란이 있습니다. 성별(Sex),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아래 '' 혹은 '' 라고 쓰면 됩니다. 그런데 한 젊은 미모의 여자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부끄러운 듯이 모퉁이로 가서 조그만 글씨로 적더라는 것입니다. '가끔씩'이라고, Sex 바로 밑에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공연히 ''자에 신바람이 나서, 그 여자와 같은 자가당착에 빠지지 마시라는 겁니다. 12연기에서의 애는 성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탐닉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모두 지칭하는 말입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 사게 되는 것(바로 이어질 취)도 바로 애에 의한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더 넓게 해석하면 싫어하는 마음은 애의 작용의 상대적 개념이긴 하지만 그 근원에는 애, 즉 탐착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탐색하는 마음을 거스르니 싫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애증愛憎 둘 다 12연기에 의하면 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작용들과 그 결과 애

 

다음은 ''인데 ''란 애의 대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집착하여 소유하고 싶다거나, 혹은 그 욕망을 지속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취가 12연기 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바로 업을 만드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짝사랑의 추억으로 간직하면 괜찮은데, 결혼한 사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액션'()에 들어가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번뇌'를 대량 생산해 내는 공장도 이 취입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세상에 취하고 싶은 것이 많으면 가난한 사람이고, 가난해도 취할 마음이 별로 없으면 부자입니다. 그렇다고 게으르고 무능력하여 가난한 게 자랑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단지 저의 의도는 취할 줄만 아는 세상에 이미 취한 것을 남에게 베푸는 마음도 내자는 것이고, 취하더라도 분수에 맞게 하자는 것입니다.

 

무소유의 정신은 물질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집착하여 소유하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라는 말인 것입니다.

 

12연기의 10번째는 ''입니다. 유란 취에 의해 구체적으로 형성된 결과인 업을 말하는데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결과물'인 업을 형태 있는 것에 한정지으면 안 된다는 말씀인데, 보통 '' 하면 눈에 보이는 사물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계기로 원한이 사무쳐 마음속으로 앙갚음을 다짐한다면 그 다짐이 유가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유란 업의 형성 작용의 구체화, 혹은 확정되어 버린 업 그 자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 다음은 ''입니다. 생은 유에 의해 펼쳐지게 되는 실제적 과보의 세계입니다. 내가 태어나게 된 것도 유의 과보이고, 원한에 사무치는 마음으로 밤잠을 못 자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도 다 생의 작용이 일으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2연기의 마지막은 '노사'老死 입니다. 내가 태어나는 과보로 늙어 죽는다는 간단한 말로는 이해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무상無常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상이란 말은 항상 하는 것은 즉, 영원히 그 상태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없다는 말이니, 육신은 물론이고 아무리 뼈에 사무친 각오와 다짐도 시간이 흐르면 그 작용이 약해지고 결국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12연기의 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2연기의 마지막인 노사란 '완전한 사라짐'이 아니라 12연기의 처음인 무명을 또다시 낳는 하나의 결과인 것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12연기법은 부처님이 처음 깨달은 법이라는 중요한 상징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12연기법에 대해 총체적인 시각으로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 내용은 성법스님 저서인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을 옮긴 것입니다.




12 연기에 대한 쉬운 해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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