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처님의 수행과 깨달음
불교는 당시의 바라문교와 사문 종교 그리고 대중의 주술적 신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출발하였다. 외도에 대한 불교의 비판은 파사현정(破邪顯正) 가운데 ‘파사’에 해당된다. 다음은 새로운 진리의 제시로서 ‘현정’은 연기법인데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에 해당한다. 부처님은 29세에 세속의 모든 부귀영화로부터 출가한 후 약 6년 동안 당시의 수행법을 따라보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알았다.
처음에는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라는 두 선정(禪定) 수행자에게 선정수행을 닦았으며, 다음으로 사문들의 지독한 고행도 해보았다. 하지만 부처님은 두 선정수행자의 경지는 조건적이고 임시적인 경지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고행 또한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길이 아님을 확연하게 깨달았다. 결국 부처님은 당시 모든 가르침과 행법으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독자적인 길을 나섰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마가다 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에서 남서쪽 가야(Gaya, 伽倻)의 우루벨라(Uruvela) 네란자라(Neranjara) 강 근처에 도달하였다. 고행으로 쇠약해진 몸을 강물에 씻고, 마을 처녀 수자따(Sujata, 善生)가 올린 우유죽을 드시고 심신을 회복한 후 자신만의 수행방법으로 중도(中道, Majjhim Patipada)를 체득하시고 깨달으셨다. 중도란 두 극단을 떠난 실천의 길로서 성도 이후 다섯 비구를 향한 첫 설법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드디어 부처님은 삡빨라(pippala, 畢鉢羅) 나무 아래서 ‘무상(無上)의 그리고 보편적인 진리의 체득으로서 깨달음’(anuttara sammāsambodhi : 無上正等正覺)을 얻어 부처(Buddha: 佛陀) 즉 '깨달은 자'[覺者]가 되었다. 이는 29세에 출가한 후 6년 만인 35세 때의 일이다. 오늘날에도 보드가야에 성도할 때 앉았던 보리수 아래의 자리를 금강보좌(金剛寶座, 돌로 된 좌대)라 하여 내려오고 있다.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은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12월 8일로, 상좌불교국에서는 베사카(Vesakha)라 하여 반열반일과 같은 날로 기념하고 있다. 또한 경전에서는 위없는 깨달음은 새벽녘에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깨달음의 내용에 관해서는 몇 가지 다른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의 특정한 가르침이 경우에 따라 깨달음과 관련하여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아함경》(권12 제296경)에서 연기법은 '모든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보편적인 법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더 나아가,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象跡喩經》) 또는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나(부처님)를 본다'(《了本生死經》)라고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근본은 연기법(緣起法)으로 압축할 수 있다. 연기법은 기존의 또는 다른 종교철학적인 모든 세계관 또는 진리관과는 전혀 다르고 차원을 달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간략하게 깨달음의 내용으로 간주되는 연기법의 요점을 살펴보자.
2. 연기법의 기본 의미
연기의 빠알리는 paicca-samuppda이다.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내는 이 말은 불교 흥기에 즈음한 다른 인도종교나 철학에서 나타나지 않은 불교만의 전문용어이다. 기본적으로 paicca-sam-uppda의 세 부분으로 분리하여 설명할 수 있다. paicca는 연(緣)으로 옮겨져 ‘~ ~ ~ 때문에’, ‘~ ~ ~ 에 의해서’라는 뜻과 samuppda는 기(起)로 옮겨졌으나 sam이 ‘함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함께 일어남’이나 ‘함께 생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계존재와 인간존재의 근거와 본질은 그 자체로서 ‘원인과 조건에 의한 일어남’ 또는 ‘여러 조건의 화합에 의한 일어남’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경전에서 연기에 대한 압축적인 정의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彼滅]라고 반복적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구절은 공간적으로 모든 존재의 동시적인 상호 의존 관계와 동시에 시간적으로 이시적(異時的)인 생멸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비유적으로 경전에서 2개 또는 3개의 갈대 단이 땅 위에 서려고 할 때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 갈대 단은 서로 의지해야만 설 수 있는 것으로 서로 간 원인과 조건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는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비유는 다시 훗날 대승의 《화엄경》에서 제석천 궁전에 드리워진 입체적인 그물과 각각의 그물코에 달린 투명구슬에는 서로 다른 구슬들이 동시에 겹겹이 그리고 끝없이 되비치고 있다는 ‘인드라망’ 비유’에서 더 실감난다. 인드라 그물[網]과 같이 서로 되비추는 복합적인 영상처럼 일체 존재의 근거와 본질도 마찬가지로 우주적 연대 속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연기법의 세계관적 의미
연기법은 다른 종교나 철학의 세계관 또는 진리관과는 전혀 다르고 차원을 달리한다. 불교의 연기법은 당시나 현재의 많은 사람들이 세계존재의 근거와 본질 문제에 있어 인습적으로 쉽게 상정하고 있는 창조론(創造論)이나 유물론(唯物論) 또는 우연론(偶然論) 등과 같은 세계관의 오류를 지적하고서 진리를 밝힌 것[顯正]이다. 연기법에 의하면 세상 만물 중에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기에 창조주와 같은 절대적인 제일원인(第一原因)이나 자기원인적인 존재도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기계적인 물질적 법칙만으로 볼 수도 없으며 또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우연으로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서로간의 관계 선상에 있는 것으로 다른 종교와 철학의 세계관에 비교하면 심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연기법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인 인과법(因果法)으로 많이 설명되지만 연기법의 인과는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직선적인 또는 단일 방향의 인과와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그것은 불교 흥기 이전의 세계와 인간의 근거와 본질을 유일한 창조주로부터 있게 되었다거나 다른 한편에서는 물질적인 전개로 보는 것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유대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유신적 세계관이나 물질 중심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모두 불교의 파사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4. 연기법의 가치관적인 의미
대체로 유신종교는 신 아래 인간과 다른 생명 간에 또는 같은 인간 사이에도 천부적(天賦的)으로 차별적인 지위와 권한의 위계가 주어진다. 즉 성경의 창세기 등에서 모든 자연과 동물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인간 우월주의’와 ‘유대민족 선민주의(選民主義)’ 그리고 베다성전의 ‘바라문 선민주의’와 같이 특정 민족이나 계급만 우월하다는 배타적 차별주의가 그것이다. 이러한 위계의 세계관은 창조신과 인간 그리고 동물이라는 수직적 주(主)와 종(從)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연기법의 의미는 이러한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대신에 세계의 근거와 본질은 ‘의존적 상호관계’로서 수직적 주종이 아니라 수평의 평등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남자가 있기에 여자가 있고, 여자가 있기에 남자가 있다. 인간이 있기에 자연이 있고, 자연이 있기에 인간이 있는 것과 같다. 이는 불교가 왜 일체 생명의 소중함과 존엄성을 강조하고 사람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좀 더 가치적인 면에서 이야기하면 인간의 아상(我相)과 아만(我慢)은 근본적으로 ‘우월주의’라는 우열(愚劣)의식에 기초하며 그로 인해 많은 고통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에서 인간 이외의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우열을 말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유신종교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이야기하지만 인간 이외의 동물에 대한 자비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때 유럽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따른 나치 독일인이 유대인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죽일 수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사람이 다른 동물을 무자비하게 죽일 때도 거기에는 우열의식에 바탕하고 있다. 즉 유럽 백인이 유대인이나 다른 인종을 자신들과 우열 관계로 보고 평등한 관계로 보려하지 않은 때문이고, 사람이 다른 생명을 우열관계로 보아 반성 없이 죽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수직적 위계로 보려는 세계관이 결과적으로 어떠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불교의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상호관련성 때문에 자타불이(自他不二)이며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생명 윤리적인 차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때문에 불살생(不殺生)이라는 계율이 오계의 첫 번째에 있는 이유도 그렇고, 그래서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연기의 이치를 투철하게 알지 못하기에 우열(愚劣)과 빈부(貧富).귀천(貴賤)․미추(美醜)․정(淨)과 부정(不淨)․다소(多少)․고하(高下)․장단(長短) 등과 같은 상대적인 이변(二邊) 또는 양변(兩邊)에 집착하고 있다. 마치 이러한 이변과 양변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대립과 충돌의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연기법은 모든 인간 세계의 상황이 인연 따라 있는 것이지 따로 빈부․귀천․미추 등이 고정되어 불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연기법은 다른 표현으로 배대(背對)적인 이변과 양변에 대한 비판으로 불이(不二)나 중도(中道)를 함의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기법은 차별적 배타주의 세계관을 극복하는 ‘원융화합의 길잡이’ 역할을 하여 인류를 구제할 대안사상이라고 세상의 뜻있는 지성인들에 의해 재평가가 되고 있는 것이다.
5. 연기법 이해의 목적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기법과 관련하여 잊지 말아야할 점은 연기법이 인생의 고통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연기법에 의하면 인생의 고통 또한 조건적으로 연기하는 것이지 고정되어 있어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떠한 신이나 물질적인 법칙에 구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고통도 한시적일 뿐,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고통의 조건을 제거해버리는 노력을 한다면 고통이 다한 지고(至高)의 행복인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르침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연기법(緣起法)의 중요한 의미는 세계관의 문제와 관련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의 문제는 고통과 같은 가치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또한 말한다. 그래서 연기법은 모든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요 근본 가르침이요 중심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세계존재와 인간존재의 근거와 본질을 규명하고 있는 중심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후 12연기를 자세히 설하시는 이유가 되며, 성도 이후 부처님의 45년간의 가르침이나 그 이후 모든 불교교리사의 전개 또한 바로 연기법에 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모든 수행도 연기법의 응용 내지 실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연기법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불교 이해의 관건이 됨을 알 수 있다.
-조준호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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