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 ‘좌초’ 후 ‘충돌’로 결론 내렸던 배경 [1]
(서프라이즈 / 신상철 / 2010-08-07)
1. 최초 천안함이 ‘좌초’했을 것이라 추론하였던 배경 |
1. 최초 천안함이‘좌초’했을 것이라 추론하였던 배경
3월 26일 천안함이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천안함과 관련하여 첫 글을 올린 날짜는 이틀이 지난 3월28일이었습니다.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소고’라는 글을 통해 해상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유형의 사고 가능성에 대하여 펼쳐놓는 것을 시작으로 천안함 관련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제가 적극적으로 사건 분석에 나섰다기보다는 항해를 전공했고 해군출신에다가 사고가 발생한 서해해역에서 근무했던 경험으로 인해 주변의 문의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사실 그 당시엔 한명숙 총리님의 공판이 막바지였던 터라 그를 위해 더 몰두했던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천안함 사건을 들여다보면서, 저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는 물론, 상식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짐에 따라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듯이 파고들게 되어 3/28 ‘해군의 총체적 난맥상’, 3/30 ‘정부는 진실을 밝혀라’ 3/31 ‘MB식 후진적 인명구조작업’ 등의 글들로, 사건과 관련 정부와 군의 대응을 질책하는 내용이었었습니다.
정작 사건의 원인과 관련하여 본격적인 분석이 이루어진 것은 4월 들어서였습니다. 4/1 ‘피로파괴로 침몰했다고?’ 4/4 ‘군은 선체 조기인양과 생존자 구출을 원치않았다’를, 4/6일에는 ‘사건 설정의 오류 - 두 번의 사고’ 글을 통해 천안함 사고를 ‘제1사고’와 ‘제2사고’로 구분하기 시작하였고 4/8일에는 ‘최초의 사고는 좌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사건 초기라고 할 수 있는 4월 초에 천안함 사고 발생이 ‘한 번이 아닌 두 번의 사고’로 나누고 ‘최초 사건은 좌초’로 결론 내렸던 배경에는, 이 사건 자체를 ‘하나의 단일 사고’로 본다면 도무지 연결 지을 수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여러 정황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되어야 비로소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게 됩니다.
46명의 해군 중 헤엄쳐 살아나온 사람이 없다
![]() |
사건의 원인에 접근하는 데에 가장 큰 단서는 ‘46명의 해군 중 헤엄쳐 살아나온 대원이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원양도 아니고 근해에서 그것도 생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인데 침몰한 구역에서 충분히 헤엄쳐 나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수십 명의 해군대원 중 실제로 빠져나온 대원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단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환경이라면 어떤 것일까요. 누군가 밖에서 문을 잠갔을 리는 없었을 터이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수 없는 환경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탈출을 막고 있었던 것은 침수로 인해 발생한 ‘과도한 수압’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도한 수압은 당연히 침수사고가 발생했기에 존재합니다. 침수는 언제부터 발생했던 것일까요. 침수가 시작된다고 바로 ‘과도한 수압’이 걸리는 게 가능할까요?
‘침수’에 대한 보고는 사고 발생 직후 해경으로, 상부로, 청와대로 모두 보고되었고, TV뉴스를 통해서도 보도가 되었던 사실입니다. 문제는 천안함 파손과 동시에 침수가 발생한 것인지 파손에 이르기 전부터 침수가 발생한 것인지의 문제인데, 이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천안함의 급속한 침몰’입니다.
천안함이 급속하게 침몰한 사실로부터 유추한다
![]() |
천안함 함수는 익일인 27일 아침 용트림 바위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당일 오후에 가라앉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국방부에서는 가라앉았던 함수가 모래톱에 걸려 ‘떠오른 것’으로 발표했었습니다만, 자체무게와 물을 합쳐 1,400톤에 달하는 쇠뭉치가 스스로 떠오른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얘기이고, 용트림 앞까지 떠밀려 갔다는 것이 바로 가라앉지 않았었다는 증거입니다.
함미의 경우 어땠을까요. 만약 천안함이 침수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반파되었다면 함미의 경우 수 시간, 아니 최소한 수 십분 정도라도 떠 있었어야 했을 겁니다. 설계도면을 근거로 조선공학도가 계산을 한다면 더 근사치가 나오겠지만, 당시 대원들이 격실 내 생존해 있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격실 밀폐로 공기 부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을 것까지 감안할 때 수 십분 정도라도 가라앉지 않고 버티었어야 한다는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함미는 불과 3분여 만에 가라앉았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반파할 시점에 이미 상당한 침수가 진행되고 있었고, 결국 반파되면서 엄청난 해수가 유입되면서 함미의 잔존부력을 급속하게 없애버렸다는 결론 외에는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화장실에서 사망한 상황,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 |
화장실 문이 열리지 않았던 데에는 과도한 수압으로 인해 문이 열리지 않았거나, 어렵게 문을 열었어도 엄청난 침수와 수압으로 인해 탈출에 실패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화장실뿐만 아니라, 침실, 사무실 등 모든 구획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했던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반파침몰 사건 이전에 침수를 야기시킨 또 하나의 사건’이 존재해야 전체 사건의 얼개가 맞아들어가는 것입니다.
천안함이 반파되고 난 이후의 정황에 대해서는 보도로 인해 어느 정도 우리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는 군 당국이 모든 것을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추론만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모든 정황과 증거의 조합으로 제1 사고의 결론은 ‘좌초’
![]() |
천안함이 인양되자 선체 하부에는 좌초로 인한 스크래치가 깊게 패인 모습이 드러났으며 좌초 시 해저지반의 돌, 자갈, 해구 등과의 접촉으로 인한 손상으로 선저하부가 찢어지거나 파공이 발생하여 물이 줄줄 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좌초를 하기 전 그물에 걸렸던 듯 스크루 샤프트, 안정기, 선저 손상부 등에는 그물 가닥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지요.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해군 스스로 작전상황도에 ‘최초 좌초’ 문구와 함께 지점에 대한 마킹까지 하였고 희생자 가족에게 브리핑까지 하였음에도 사실이 아니라고 거짓말로 일관하다가 그들의 거짓말을 입증하는 동영상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밝혀졌으며, 희생자 가족의 증언을 통해 해군 스스로 작전상황도를 들고 희생자 가족들에게 ‘최초 좌초’에 대해 브리핑한 사실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5월5일 KBS 추적60분)
그리고 좌초로 인한 손상이 아니면 설명 자체가 불가능한 스크루 프로펠러의 손상에 대하여 두 번에 걸쳐 거짓말을 하였던 합조단은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 정반대의 현상을 보여주었고, 그들 스스로 오류를 인정한 가운데, 스크루 프로펠러의 손상은 해저지반과의 접촉(좌초)으로 발생하였다는 러시아 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발표됨으로써 러시아 역시 천안함이 좌초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사고가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것을 적시한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합조단의 보고 이후 감사원의 감사결과, 최초사건의 시간은 ‘21:15’이었는데 그 보고에 ‘ㄴ’자를 그려 ‘21:45’로 조작을 했다는 사실과 그것을 합참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천안함 반파 침몰 시간인 21:22 이전에 이미 첫 사고의 존재가 입증되는 등, 첫 사고의 존재를 부인하고 위장했던 모든 거짓 주장과 논리가 뒤집히고 백일하에 드러남으로써 이제 ‘최초 좌초’ 사실을 뒤엎을 정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상철
덧글 : ‘2. 좌초 후 발생한 제2 사고를‘충돌’로 추론하였던 배경’에 대해서는 내일 오전 중 올리겠습니다.
'알고 삽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와대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펌- (0) | 2010.08.18 |
---|---|
스모킹 건 - 천안함의 진실 - (0) | 2010.08.09 |
<쥐코> 동영상이란? (0) | 2010.07.04 |
천안함 의혹 7가지 '뉴스'…"산에서 고래를 만났다" (0) | 2010.06.30 |
[천안함] 생존자의 증언을 나는 믿을 수 없다.<펌> (0) | 2010.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