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장 넓은 면적의 섬으로 일찍부터 인간이 거주해 왔다. 동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주변 지역과의 교역도 비교적 활발했던 지역으로 특히 고려시대 이후에는 국내 최대의 목마장으로 성장하면서 국가적 관심이 두드러졌던 곳이다. 제주도가 지니는 이러한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이 지역의 형세를 파악하기 위한 지도제작이 일찍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목종 때에는 제주도의 서산(瑞山)에서 화산이 폭발하자 조정에서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가 파견되어 산의 형상을 그리고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의 그림은 폭발로 형성된 산과 그 주변 지역을 그린 회화식 지도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전기 지리지와 지도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던 양성지가 1482년(성종 13)에 「제주삼읍도(濟州三邑圖)」를 그려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다른 고을이나 도서지방에 비해 지도가 활발히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하는 제주도 지도는 대부분 조선후기 간행된 것이다. 다른 지역의 지도들도 대부분 비슷한 실정인데 조선전기 제작된 대부분의 지도들이 전란을 거치면서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존하는 단일 군현의 지도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종류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제주도의 고지도는 대부분 낱장으로 그려진 것이거나 『해동지도(海東地圖)』와 같은 군현지도책에 수록된 것들이다. 1709년 목사(牧使) 이규성(李奎成)이 목판으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幷序)』와 18세기 중반 제작된 『해동지도』의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는 제주도를 대표하는 지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후에 제작된 대부분의 제주도 지도들은 이 지도들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되어 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제주도 지도의 양대 계보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탐라지도병서』의 형태를 따르는 지도들은 대부분 대형의 낱장 지도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 계보에 속하는 지도들은 제주도의 모습이 비교적 실제에 가깝게 그려져 있고 읍치(邑治), 방호소(防護所), 각 촌락, 중산간의 목장 지대, 임수(林藪), 포구 등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토의 남해안 사이에 산재한 여러 도서들, 중국, 일본, 유구국 등의 외국지명도 방위의 왜곡이 덜한 편이다. 그리고 읍성을 비롯한 군사기지, 포구, 목장 등의 모습에서도 거의 동일한 축척을 유지하고 있는 보다 사실적인 지도의 유형에 속한다. 이 유형의 지도는 행정, 군사 등 실용적 차원에서 관에서 주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872년 조선왕조에서는 마지막으로 국가 주도의 지도제작 사업이 행해졌는데, 이 때 제작된 『제주삼읍전도』도 이 유형에 속하는 지도로 볼 수 있다.
이와 반면 다른 한편의 계보를 이루는 지도는 대형의 낱장 지도가 아닌 군현지도책에 수록된 형태로 존재한다. 앞의 유형에 비해서 규격도 작고 제주도의 모습도 동서로 압축되어 왜곡된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등 성곽으로 이루어진 읍치와 방호소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강조되어 크게 그려져 있는데 관아 건물도 매우 상세하다. 수려한 경관을 지닌 성산 일출봉, 산방산, 송악산 등이 크게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홍살문을 그려 열녀문과 효자문을 표시하였고 정자와 사우(祠宇) 등도 그려 넣어 문화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제주도 주변의 도서나 남해안 지역, 그리고 중국․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지명들은 거리 관계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그려져 있어서 『탐라지도병서』의 유형에 비해 사실성이 떨어진다. 이러한 특성은 각각의 지도가 제작되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나 제작의 의도가 달랐던 데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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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군읍지』의 제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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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지도』의 제주삼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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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두 계보 이외에도 제주도를 그린 독특한 지도가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당시 목마장의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지도로 177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삼읍도총지도(濟州三邑都摠地圖)』와 1899년 『제주군읍지(濟州郡邑誌)』에 수록된 「제주지도(濟州地圖)」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제주지도」는 지리지에 수록된 흔치않은 지도이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제주도 지리지에는 지도가 실려 있지 않지만 『제주군읍지』에는 상세한 지도가 들어 있다. 『제주군읍지』는 1899년(광무3) 5월에 전국 읍지 편찬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으로 조선왕조 최후의 관찬읍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 수록된 지도에는 당대의 최신 정보들이 반영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의 제주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지도에는 1895년 행정구역이 모두 군(郡)으로 변경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읍지에 첨부된 지도이지만 규격이나 수록된 내용이 매우 자세하다. 전체적인 윤곽은 다소 왜곡되어 있으나 이는 책의 규격으로 인해 초래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이전 시기 독립된 형태의 제주도 지도에서처럼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전 지도에서 보이는 24방위 표시나 외국 지명들과 남해안, 그리고 그 사이의 섬들은 제외되어 있다. 중앙부의 한라산은 풍수지도인 산도(山圖)처럼 맥세를 강렬하게 표현하면서도 독립된 형태의 오름도 상세히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목장이었던 10소장의 경계가 상잣성과 하잣성을 중심으로 명확하게 그려진 점이 이전 지도와 다르다. 하천도 상세하게 그렸는데 군 경계와 구분하기 위해 점선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해안에는 도로만이 그려져 있고 해안선의 표시가 없는 것도 한 특징이다. 해안에 그려진 일부 섬을 통해 해안선의 윤곽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목장의 상잣성 위쪽으로도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여섯 군데에 화전동(火田洞)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뒤의 읍지 본문에 화전세를 수세하던 기록이 있어 산장이 있던 곳에 화전촌이 형성되어 이들을 상대로 별도의 세금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10소장과 자목장(字牧場) 체제로 이어져 내려왔던 제주도의 마정은 1895년(고종32) 지나친 貢馬와 연이은 흉년으로 인해 공마제(貢馬制)를 혁파하고 돈으로 바꾸어 상납(上納)하도록 하는 조치가 행해짐에 따라 국영목장으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지도에 표시된 화전동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산마장에서부터 화전의 개척이 이뤄지고 있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제주지도」는 전래의 지도를 참조하면서도 새로이 변한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읍지의 부도(附圖)이다. 필자: 오상학(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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