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위굴의 여신 산방덕의 눈물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산방산이라는 수려한 산이 있다. 그 산 중턱에 산방굴이라는 천연동굴이 있는데, 동굴 안에 들어서면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다. 이 것은 그 옛날 한 여인이 변하여 된 것이라 한다.
아주 오랜 옛날, 산방산 아래에 나이 지긋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남편이 나무를 하러 산방산에 올라갔는데, 산방굴 옆을 지날 때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굴 안을 살펴보니 갓난아기가 있었다. '흉년으로 살기가 어려워진 부모가 내 다 버렸을까?' 그는 가엾은 생각에 얼른 아기를 품에 안았다. 계집아이였다. '어쩜 이 아기는 산신령님이 자식 없는 우리 부부에게 준 선물인지도 몰라.'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그 자리에서 산신령님께 감사의 절을 올렸다. 사실 그 아기는 인간의 아기가 아니었다. 바위굴의 여신이 인간 세상을 알고 싶어 아기로 환생한 것이었다.
접에 와서 부인에게 아기를 얻은 경위를 설명하자 부인도 뛸 듯이 기뻐하며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다.
"아유! 경사 났군요. 자식이 없어 늘 쓸쓸해 보였는데 이런 귀한 선물을 얻었으니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노부부는 아기 이름을 산방덕이라 지었다. 산방산 신령님의 덕으로 얻은 아기이기 때문이다.
산방덕은 부모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노부부는 산방덕을 키우는 재미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다. 그녀는 자랄수록 용모가 빼어날 뿐 아니라 심성이 고와 온 고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산방덕이 이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기 시작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몇 달을 사이에 두고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여신의 환생이라 한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이상 어찌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겠는가? 산방덕은 난생 처음으로 외로움을 뼈 속 깊이 느꼈다. 그녀가 사는 집은 산아래 외딴 집이었기 때문에 혼자 지내기가 여간 무섭지 않았다.
좀 떨어진 곳에 고승이라는 총각이 있었다. 그는 혼자가 된 산방덕이 안쓰러워 자주 찾아가 위로해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집안 일도 도와주었다. 산방덕은 그런 고승이 고맙고 믿음직스러웠다. 어느 새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의 축복 속에 혼인을 하였다. 꿈같은 세월이 흘러갔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일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가 생각하니 산방덕은 인간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꼈다. 너무나 행복해 운명의 신이 시새움을 한 것일까? 고을의 사또가 산방덕의 뛰어난 미모를 보고 탐을 내기 시작하였다. 미인박명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고승이 없는 틈을 타 사또는 혼자 있는 산방덕에게 수작을 부리거나 재물로 환심을 사보려 하였다. 그때마다 산방덕은 단호히 물리쳤지만 그럴수록 사또의 집착도 더 커갔다. 그녀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포졸들이 산방덕의 집에 들이닥쳐 다짜고짜 남편을 오랏줄로 묶는 것이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소? 대체 우리 서방님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오?"
산방덕이 울면서 항의를 했으나 포졸들은 막무가내로 고승을 관아로 끌고 가 버렸다. 산방덕은 관아 가까이 묵으면서 고승의 구명운동을 벌여보았으나 만사가 허사였다. 터무니없는 살인 누명을 쓰고 고승은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되었다. 그가 귀양지로 떠날 때 나졸들이 이렇게 말하며 킬킬거렸다.
"이놈아, 넌 분수에 맞지 않은 예쁜 색시를 맞은 게 죄야. 상민인 주제에 그런 예쁜 색시가 가당키나 하단 말이냐?"
나졸들의 이런 지껄임을 들은 산방덕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이제 남편은 살아서 돌아올 수가 없겠구나! 서방님과는 오늘이 마지막이로구나!' 멀쩡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 때는 사또가 결코 남편을 살려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했다. 산방덕은 귀양길을 떠나는 고승의 손을 잡았다.
"몸조심 하세요!"
"당신도 몸조심 하구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서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은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고승을 보내고 산방덕은 집으로 돌아 왔다. 그녀의 소원이라면 고승의 시신이라도 거두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것이었다. 이럴 무렵 사또가 찾아왔다. 온갖 감언이설과 위협을 섞어가며 산방덕을 설득하려 들었다.
"네가 내 첩이 되어 준다면 남편은 무사히 풀려날 것이다."
산방덕은 도리질을 하였다. 남편을 사지로 몰아넣은 원수를 섬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 마음먹었다.
"난 절대로 남편을 배신할 수 없소. 다시는 내 앞에서 그 따위 수작 마오!"
매섭게 쏘아 붙였다. 그러나 사또의 회유와 위협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회유와 위협이 통하지 않자 사또는 강제로 산방덕을 차지할 생각으로 밤에 그녀의 집에 찾아왔다.
"오늘은 기어이 내 너를 차지하고 말리라."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 산방덕은 요염하게 웃으면서 사또에게 말하였다.
"좋아요 나리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어요."
"그게 정말이냐? 이제야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하지만 오늘밤은 곤란해요. 제 몸이 불결해 기쁜 마음으로 나리를 모시기가 어려우니 하룻밤만 여유를 주세요. 내일 이맘 때 꼭 나리를 모시겠어요."
산방덕이 속삭이듯 말하자 사또는 황홀한 기분이 되었다. '드디어 뜻을 이루게 되었구나!' 그는 산방덕의 풍만한 몸을 안은 상상을 하며 그날 밤은 그대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산방덕은 며칠째 생각해오던 것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밖으로 나와 지금까지 살던 집을 둘러보니 양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지내던 일들이랑 남편 고승을 만나 혼인하고 살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길지 않은 세월이지만 참 행복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행복을 지켜갈 수가 없구나. 하지만 난 영원히 서방님의 여자로 남을 거야.'
산방덕의 눈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산방덕은 산방산으로 올라갔다. 산 중턱 산방굴 앞에서 다시 한번 지금까지 살던 집을 내려다 본 후 천천히 굴 안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자 남편 고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방님, 난 영원히 당신의 여자로 남겠습니다!' 산방덕의 몸이 서서히 바위로 변해갔다. 바위굴의 여신이 바위로 되돌아 간 것이다.
지금도 산방굴에는 산방덕이 변한 바위 밑으로 쉬지 않고 물이 떨어져 작은 샘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이 물줄기를 남편을 그리워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흘리는 산방덕의 눈물이라 한다.
神들의 섬 -제주의 신화와 전설- 2001 제주세계섬문화축제조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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