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 출신의 소설가 이병주(李炳注·1921~1992)는 한국 문단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일제 말기 학병으로 끌려간 그는 해방 후 교사, 해인사 입산, 신문사 논설위원, 대학 강사, 사상편력과 수감생활, 낙선, 사업 등 다양한 삶을 살았다. 폭넓은 교류와 박학다식을 바탕으로 그는 생전에 원고지 10만매가 넘는 분량을 집필했다. 그가 손댄 분야는 소설·수필·칼럼 등 장르도 다양했다. 단행본으로 나온 책만도 80여 권, 대하 장편소설만 35편에 이른다니 다작가이자 선 굵은 대가(大家)라고 하겠다. 작년 여름 나는 이병주의 장편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전 10권)를 우연히 읽게 됐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역성(易姓)혁명(왕조교체)을 꿈꾼 한 야심가의 삶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최천중은 입신출세의 길이 막힌 천민 출신으로, 당대 제일의 술객(術客·점을 치는 사람)이었다. 열강이 각축하던 그 시절 조선은 무능과 부패가 극에 달해 왕조 말기현상을 보였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최천중은 불원간 망하게 될 조선을 물려받아 이상국가를 세울 요량으로 왕재(王才)가 될 자식을 가져야겠다며 왕재를 낳을 밭(여성)을 찾아 나선다. 그는 대업에 필요한 인재와 재물을 모으는 법, 미래를 보는 법,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등에도 능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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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의 <바람과 구름과 비>(왼쪽), 론다 번의 <시크릿> 표지 |
그 무렵 재미삼아 읽은 책이 한 권 더 있다. 전직 PD 출신의 호주인 론다 번이 쓴 <시크릿(The Secret)>이 그것이다. 이 책은 ‘비밀’을 이용하여 건강, 부, 행복 등 인간의 소망을 성취한 사람들의 지혜와 비밀 활용방법 등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비밀이란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한다. 돈이든 벼슬이든 사랑이든 마음을 먹고 강하게 끌어당기기만 하면 다 이뤄진다는 얘기다. 다소 황당한 내용 같지만 기적과도 같은 경험을 한 사례가 무수히 많아 완전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기적을 ‘창조’해내는 첫 단계는 자신의 소원을 ‘우주’에 주문하는 일이다.
“우주에 명령을 내려라. 당신이 뭘 원하는 지 우주에 알려라. 우주가 당신 생각에 응답할 것이다.” (밥 프록터·베스트셀러 작가)
“‘방법’은 우주가 관장하는 영역이다. 우주는 언제나 가장 빠르고 짧고 조화롭게 꿈을 이뤄줄 방법을 알고 있다.” (마이크 둘리·모험가 출신의 사업가)
소설 ‘혜주’에는 3인방이 등장한다. 혜주가 공주시절 ‘몸종’처럼 혜주를 돌본 민(閔) 상궁, 승려 출신의 무극(無極), 그리고 술객 노천(盧天) 등이 그들이다. 박근혜 정권의 ‘문고리 3인방’과 흡사하다. 혜주의 3인방은 각자 역할이 분담돼 있다. 민 상궁은 수족, 무극은 말 상대, 노천은 책사에 해당한다. 셋 가운데 가장 끝까지 권력을 유지하면서 실세로 군림한 사람은 술객 노천이었다. 혜주는 큰일을 당할 때마다 노천이 시키는 대로 국정을 처리했다. 궐내에서 ‘권력서열 1위’는 사실상 노천이었다.
혜주의 부친 광조(光祖)가 사고로 죽자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 큰 문제가 됐다. 광조는 두 아들이 일찍 죽어 슬하엔 공주(혜명공주) 하나밖에 없었다. 궐내 여당 격인 남파(南派)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혜명공주를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한국의 보수집단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과 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야당인 북파(北派)는 공주를 왕으로 세운 선례가 없다며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남파는 ‘선례가 없다고 해서 공주를 왕으로 세우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맞섰으나 이것만으로는 명분이 약했다. 이때 술객 노천이 남파에게 ‘묘책’을 하나 제시하였다.
“달리 방법이 없다면 유언비어(流言蜚語)라도 하나 만들어내야죠. 그게 바로 술책(術策)인 게지요. 제가 생각해둔 게 하나 있습니다만….”
노천은 혜명공주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서는 여왕의 등장을 기정사실화, 또는 예고하는 도참(圖讖·일종의 예언)이 하나 필요하다고 했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두고 “구미 금오산에는 두 명의 대통령이 난다”고 한 소문이 바로 그런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식의 것이긴 하나 때론 이런 것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노천은 일반백성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간단명료한 도참을 하나 내놨다.
‘出初女帝 救世迎福’(출초여제 구세영복)
(처음으로 나온 여왕이 세상을 구하고 복을 맞이한다)
남파는 이 도참이 저자거리나 주막 같은데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도록 작전을 짰다. 이틀 뒤 종로 피맛골 주막집 담벼락에 ‘出初女帝 救世迎福’라고 쓴 괴벽보가 나붙었다. 길 가던 행인들이 그 앞에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다음날에는 광화문 앞 육조(六曹) 거리에도 괴문서가 나붙었다. 불과 닷새도 안 돼 한양 저자거리에서는 ‘여자 임금’ 얘기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이 소문은 대궐 담장을 넘었다. 의금부가 나서서 탐문을 벌였으나 출처를 알아내지 못했다. 남파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북파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됐다. 노천은 혜주가 왕위에 오르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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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유일한 여왕 혜주 |
즉위 초기 혜주 곁에는 딱히 측근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혜주는 수족 같은 민 상궁과 국사를 논의해 처리했다. 어느 날 민 상궁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회운사 주지 태허스님을 국사(國師)로 초빙할 것을 혜주에게 건의하였다. 개국 이래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펴고 있어서 이는 즉각 대신들의 반발을 샀다. 고민하고 있던 혜주에게 민 상궁이 다가가 말했다.
“전하! 강하게 밀어 붙이시옵소서, 신료들에게 전하의 강단을 보여주시옵소서!”
혜주는 측근인 민 상궁의 주청을 받아들여 곧이곧대로 실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혜주는 궐내 대소 신료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혜주를 옹립하는 데 앞장선 남파로서는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혜주가 임금인 이상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궁리 끝에 남파는 술객 노천을 간자(間者·첩자)로 투입하기로 했다.
남파의 우두머리이자 영의정 홍문식은 혜주에게 국정을 자문할 책략가 한 사람을 소개하겠다며 노천을 추천했다. 그러면서 홍문식은 노천이 ‘出初女帝 救世迎福’의 창안자라는 사실을 혜주에게 알려주었다. 혜주는 뜻밖에 나타난 ‘은인’을 반갑게 맞으면서 노천을 자신의 곁에 두기로 마음먹었다. 이튿날 이조(吏曹)에서는 혜주의 명을 받아 노천을 종2품 당상관(현 차관급)으로 발령을 냈다. 노천의 직책은 우별직(右別職), 기존 직제에 없는 자리였다. 신설 직제를 두고 사헌부 등 3사(司)에서 들고 일어났지만 혜주의 기세를 꺾진 못했다.
며칠 뒤 혜주는 은밀하게 노천을 불렀다. 술객 출신인 그에게 자신의 앞날에 대해 점을 한번 쳐달라고 부탁했다. 노천은 쾌재를 불렀다. 자신의 재량을 맘껏 뽐내고 임금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윽고 노천이 점괘를 풀었다.
“전하께옵서는 군왕이 되실 사주를 타고나셨으나 초년에 등극하신 여제(女帝)로서 넘어야할 난관이 적지 않사옵니다. 임금의 자리는 쟁취하는 것보다 지켜내는 것이 더 어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주변사람을 쉽게 믿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정치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하는 비정한 것이옵니다. 인심도 함부로 쓰시면 되레 독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시옵소서!”
노천이 들려준 얘기는 혜주의 귀에 쏙쏙 박혔다. 그간 혜주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혜주는 비로소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주는 감격한 나머지 “우별직! 그간 어디서 뭘 하시다가 이제야 나타나셨소?”라며 울먹이기까지 했다. 이후 혜주는 노천을 최측근으로 삼고 전적으로 그와 국사를 의논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혜주는 민 상궁의 요청으로 회운사 승려 무극을 좌별직으로 임명하였다. 이를 두고 대소 신료들이 연일 상소를 올리며 다시 들고 일어났다. 혜주는 대신들에게 “그리도 못마땅하시오?”라며 몹시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혜주는 이번에도 노천을 불러 대응방안을 물었다. 노천은 혜주에게 맞장구를 쳐주며 기분을 맞춰주었다. 마치 ‘입속의 혀’와도 같았다.
“염려 마시옵소서! 전하는 이 나라의 군주십니다. 전하께서 마음만 잡수시면 못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국법이나 관례라는 것도 다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만든 것은 언제나 새로 바뀔 수도 있으며 전례가 없는 것은 새로 만들면 되는 것이옵니다. 아울러 신하들의 상소에 대해 매번 비답(批答·상소에 대해 임금이 답함)을 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무시도 하나의 의사표시이옵니다. 그래서 비답 중에는 답을 내리지 않는 불윤비답(不允批答)이라는 것도 있사옵니다. 절대로 약한 모습을 모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노천의 얘기가 끝나자 혜주는 무릎을 치며 반겼다.
“오호! 그런 게 다 있었소? 우별직은 어찌도 그리 명쾌하시오? 과인의 속이 다 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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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주의 ‘입속의 혀’ 노천. 사진은 사극의 한 장면 |
계미년 여름, 경기도 일대에 큰비가 내려 물난리가 났다. 특히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이수두(二水頭·두물머리) 지역이 피해가 컸다. 조정의 무능과 무대책으로 두물섬 마을 전체와 주민 90여명이 수장되고 말았다. 얼마 후 희생자 가족들이 흥인지문(동대문) 앞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급기야 성균관 유생들이 시위에 가세하는 등 문제가 커지자 혜주는 다시 노천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노천은 나향욱의 ‘개.돼지 발언’이 연상되는 답을 했다.
“나라를 다스리다 보면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전쟁 때는 수천, 수만 명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두물섬 사고는 불가피한 천재(天災)입니다. 그러한 즉 전하께옵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백성들은 마구간 누렁소나 뒷간의 똥돼지들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나면 죽고 죽으면 또 태어나는 법이옵니다. 부디 성심을 굳게 보지(保持)하시옵소서.”
혜주는 중요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노천에게 대응방안을 물었고 노천은 매번 강경 일변도의 주장을 폈다. 이는 사리와도 맞지 않았고 민심과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심지어 노천은 혜주에게 가급적 신하들과의 대면을 피하고 면담 때는 우별직을 거치도록 건의했다. 이 역시 원안대로 받아들여졌고, 이로써 혜주는 신하들과도 멀어졌다. 혜주를 파멸로 이끈 것은 아집과 독선은 물론이요, 불법과 음행, 그리고 불통(不通) 때문이었다. 결국 임금의 최측근이요, 당대 최고의 실세인 노천이 혜주를 망쳤다. 혜주 재위 당시 조선은 술객이 통치하던 나라였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가(家)의 인연은 40년이 넘는다. 최순실의 부친이자 사이비 교주로 알려진 고 최태민 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영애 박근혜’와 교분을 맺었다. 세간에 최태민-박근혜 두 사람의 관계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어떤 이는 두 사람을 두고 “영적 부부관계”라고도 했다. 물론 이들의 관계가 구체적인 근거로 확인된 것은 별로 없다. 소문뿐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최-박 두 사람의 교분은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인간관계라기보다는 사이비종교를 매개로 얽힌, 일종의 ‘기형적인 관계’일 것이라는 추론이 많다.
몇몇 증언자에 따르면, 영세교(영생교) 교주 최태민은 나름의 영적 능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종교연구가 고 탁명환 소장은 1973년 대전에서 최태민(당시 이름은 원자경)을 만난 적이 있다. 탁 소장은 그 후 “그에게 소위 ‘영력(靈力)’이 어느 정도 있는 게 사실”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그 ‘능력’이라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와는 다른, 일종의 대(大)무당 같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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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은 자신을 ‘영(靈) 세계에서 온 칙사’라고 소개했다. 사진은 최태민이 1973년 5월 13일자 대전일보에 냈던 광고 |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당신은 여왕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것을 최태민이 영적 능력으로 정확히 예언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예언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이런 예언은 밑져야 본전이다. 점괘(예언)가 맞지 않았다고 해서 따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구미사람들 말대로라면 박근혜는 금오산 정기를 받아서 대통령이 됐는지도 모른다.
1994년 최태민 사후 그의 영적 능력은 딸 최순실에게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최순실을 영생교 ‘2대 교주’라고 부른다. 최순실은 ‘10.26사건’으로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나온 뒤 곁에서 힘이 돼주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고 말했다) 그런 인연으로 최순실은 대를 이어 박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를 지속해왔다. 박 정권의 비선실세로 불린 최순실은 혜주에서 보자면 ‘민 상궁+노천’에 가깝다. 박관천 전 경정이 최순실을 일컬어 ‘권력서열 1위’라고 한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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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영애 시절 최태민(왼쪽사진), 최순실 씨와 찍은 모습 |
jtbc의 특종보도로 공개된 최순실의 태블릿 PC에는 놀라운 자료들이 여럿 들어 있었다. 최순실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전부터 국정의 주요문건이나 청와대의 기밀문서를 불법적으로 받아본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그는 박 대통령의 연설문도 제 맘대로 손질하였으며, 이는 실지로 대통령 연설에 반영됐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비선의 ‘국정농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최-박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극히 자연스런 일이 아니었을까? 즉 교주와 신도 간의 가르침, 혹은 교감 같은 것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4월 25일 한-브라질 비즈니스 포럼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인용하면서 “정말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고 했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에서도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준다.”며 ‘우주’를 재차 거론했다. 또 그해 11월 10일 국무회의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 언급하면서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고,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연설문 등에서 종교냄새가 짙은 ‘우주’ ‘혼’ ‘기운’ 같은 말을 쓴 사례는 여태 보지 못했다.
노천은 국정경험이 전무한 한낱 술객에 불과한 자였다. 그런 자가 혜주를 사로잡고서 나랏일을 쥐락펴락 했다. 혜주시대는 술객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나라였다. ‘강남아줌마’ 격인 최순실 역시 마찬가지다. 국정경험은 물론 제대로 직장경험조차도 많지 않다. 그런 최순실에게 대한민국 국정이 농단을 당했으니 박근혜 정권은 무당(사이비 교주)이 통치한 나라라고 봐야할까? 혜주를 망친 사람은 노천이었다. 420년도 더 지난 지금, 술객 노천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걸까?
(* 제3화. ‘유언비어 유포자 혓바닥을 잘라라’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