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의미
도성제는 괴로움을 소멸하고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중도는 양극단을 떠난 실천으로써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아니고,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길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쾌락주의자나 고행주의자 같은 외도의 사문들이 성행한 시절이었다.
부처님께서도 고행주의에 극단까지 가 보셨지만 그것이 곧 깨달음에 이르는 실질적인 방법은 아님을 깨달으시고 당시의 시대적인 실천 수행법을 모두 버린 채 중도의 독자적 길로 걸어가신 것이다.
『소나경』은 이러한 중도에 대해 거문고 줄을 너무 강하게 조여도 소리가 잘 나지 않으며, 너무 느슨하게 해도 소리가 잘 나지 않는 것처럼 수행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이 동요되고, 너무 느슨해지면 나태하게 되므로 중도적인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중도야말로 수행자에게 있어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수행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길을 알려 준다. 중도란 단순히 어정쩡하게 중간의 길을 걸어가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느 한 쪽이든 극단으로 치우쳐 집착하게 되는 삶의 방식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기본 교설은 연기법이라고 했다. 연기법에 따르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처럼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한 인연 관계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될 따름이다. 그렇기에 초기불교는 연기를 곧 무아라고 이해한다. 실체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들은 비실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가치나 표현을 가지고 그것을 규정지을 수는 없다. 길다거나 짧다, 옳다거나 그르다, 아름답거나 추하다는 등의 모든 상대적인 극단은 사실 인연 따라 그렇게 불려지는 것에 불과하다.
연필은 긴가 짧은가? 그것은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인연이 옆에 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봇대 옆에서 연필은 짧은 것이지만, 성냥개비 옆에서는 긴 것이 된다. 인연 따라 길거나 짧다고 느끼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그렇기에 그 모든 것들은 중도적으로 이해될 뿐, 극단으로 치우쳐서 바라볼 수는 없다. 그래서 연기된 모든 것들은 무아이고 중도적으로 이해된다.
연기된다는 것은 나 홀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뜻이다. 내가 있기 위해서는 나와 연관된 일체 모든 존재가 크고 작은 인연으로 도울 때 가능한 것이다. 이 연결성은 앞에 연기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우주법계 전체가 모두 함께 동참하여 꽃을 피우고, 내가 이 자리에 있도록 도운 것으로써, 중중무진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사실은 나를 있게 한 것은 이 우주 전체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가 인연 따라 잠시 나의 모습으로 잠깐 드러난 것일 뿐이다. 결국 나는 이 우주 전체와 다르지 않다. 이 우주법계를 바다라고 한다면, 나와 너, 모든 크고 작은 존재는 단지 그 일부인 파도일 뿐이다. 파도와 바다는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너와 나는 서로 다르지 않고, 나와 우주는 서로 다르지 않다. 너에게 베푸는 것은 곧 나에게 베푸는 것이며, 너를 도울 때 내가 도움 받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무주상보시이며, 자비다. ‘내가 너를 돕는다’는 상을 낼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동체적인 생각, 불이(不二)적인 사유의 바탕에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을 수 없다. 상 없이 자비를 베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연기와 무아, 자비와 중도는 서로 다르지 않은 가르침이다. 이처럼 연기와 무아, 자비의 가르침이 현실로 드러날 때 중도적인 시각과 중도적인 관찰, 중도적인 실천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도야말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표적인 수행방법이며, 고를 소멸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요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수행이라고 하면, 염불하고, 좌선하고, 독경하며, 다라니를 외고, 사경하며, 절 하는 것 등만을 수행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따져보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염불하라고 한 적도 없고, 다라니나 진언을 외우라고 한 적도 없으며, 사경이나 간화선을 얘기한 적도 없다. 오로지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실천하라고 하셨을 뿐이다. 즉 중도적인 시각, 중도적인 관찰이 중요한 것이다.
세상을 중도적을 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수행이다. 절을 3,000번 하고, 10시간씩 앉아서 꼼짝하지 않고 좌선을 해야지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중도적으로 바로 보는 것이야말로 참된 수행이다.
과도하게 어떤 한 가지 가치에 사로잡혀 있다거나, 특정한 목표에 집착해 있다거나, 한 사람을 유난히 애착하거나 미워한다거나, 특정한 정치적 성향에 과도하게 집착한다거나, 내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이고 다른 종교는 다 틀린 것이라고 여긴다거나, 심지어 수행을 통해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한다고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 조차 중도에서 어긋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생각, 가치관, 삶의 방식을 ‘옳다’고 여기고, 그것과는 다른 상대방의 생각을 ‘틀렸다’고 생각함으로써 내 생각에는 집착하고 상대방의 생각에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중도적인 가르침에서 본다면, 아무리 옳은 가르침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수행의 길이 아니다.
『금강경』에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한 것처럼, 불교의 중도적 가르침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인 법이라 할지라도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집착해서는 안 됨을 설하고 있다. 불교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타종교는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중도적이지 않은 관찰이다. 만약 불교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선이며, 타종교는 절대적으로 틀렸고 절대악이라고 여긴다면 불교는 타종교를 상대로 싸움을 걸거나, 심지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 옳고 그르다는 생각이 실체화된다면 실체적인 선인 불교를 위해 실체적인 악인 타종교와 전쟁을 일으켜 죽여도 된다는 논리가 생겨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비불교적이며, 중도를 벗어난 어리석은 생각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중도적인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에 대해 특별히 과도하게 좋아하거나, 과도하게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떤 생각이나 판단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절대적으로 옳다고 추종하거나, 과도하게 잘못이라고 폄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중도적으로 대한다. 중도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좋거나 나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치우치지 않은 시선을 말한다.
이처럼 중도는 어느 한쪽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거나, 다른 한 쪽을 틀렸다고 보는 극단적 편견을 버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선입견과 차별심 없이 바라보는 삶의 실천이다. 차별과 분별없이 다만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자비의 실천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나누어 놓고 어느 한 쪽을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자비가 아니다.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그 존재 자체를 허용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비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매 순간 순간을 관찰함으로써 매 순간 나의 행위가 중도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생각이 중도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말이 중도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견해가 극단에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나의 직업이 중도에 어긋나는 직업은 아닌지 등에 대해 매 순간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수행이다.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 입문 그림 자료 (0) | 2016.01.13 |
---|---|
[스크랩] 제21회 포교사고시 예상문제와 정답(1-38회) 올림 (0) | 2016.01.11 |
불교의 세계관(三界, 六道, 須彌山, 十界) (0) | 2015.12.22 |
인도불교유적지(상세)지도 (0) | 2015.12.18 |
시다림법회 순서와 내용 (0) | 2015.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