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학살자, 호전주의자였다
“나는 지금이 우리들이 공격 조치를 취하고 평양에 있는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한 절호의 시기라고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김일성파의 인간들을 산악지대로 축출하고 그들이 그곳에서 굶어죽게 할 것이며 그 다음에 우리의 방어선은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에 걸쳐 증강되어야 할 것입니다.”(박태균 저 <한국전쟁>에서 재인용)
이것은 이승만이 미국인 정치 고문 로버트 티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글의 일부이다. 이 편지는 6·25 남침 9개월 전인 1949년 9월 30일 작성된 것이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북침의 의지와 그에 따른 지원을 미국인에게 요청하고 있다.
이승만은 재임 중 북진통일을 입에 달고 다녔다. 6·25 남침 직전에도 당시의 각료 조병옥 같은 이는 <서울신문>에 북진의 시급성을 강조하는 글을 써대고는 했다.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것은 당시 국방장관과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신성모의 말이었다. 이는 한국전쟁 발발 유인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음을 시사한다.
이승만은 미국과 함께 한국전쟁 직전까지 4·3 항쟁 등에서 6~10만에 달하는 좌익과 양민을 죽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는 15~30만에 이르는 좌익인사와 양민을 처단했다.
6·25 직전인 1950년 6월 19일 김일성은 이승만에게 평화통일추진 특사를 파견했다. 물론 이것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다만 노태우 정부 때 고르바초프가 가져온 소련 문서에는 스탈린이 먼저 남측에 평화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김일성에게 조언한 기록이 있다.
아무튼 이승만은 북에서 온 특사를 잡아다 온갖 고문을 다하여 불과 며칠 만에 전향 선언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일은 보수· 우익들이 보아도 온당할 수가 없다. 참고로 당시 보수 김성칠(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역사 앞에서>에 남긴 일기 한 토막을 읽어 본다.
“이북의 소위 조국통일 호소에 대한 이남의 처사도 온당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넘어온 사람은 곧 되돌려 보내고, 그 제안의 불합리함을 천하에 밝히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닐는지?
제안의 내용은 우물쭈물 비밀에 붙이고, 이른바 호소문을 가져온 사람을 잡아서 전향을 시키고 방송을 하고 하니, 아무리 억지의 제안을 가져왔대도, 사자(使者)의 형식으로 월경해 온 사람들을 잡아서 족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남이며, 그들이 대한민국에 넘어와 보고 감격한 나머지 이북을 배반하기에 이르렀다는 발표는 좀 지나치게 어수룩한 수작이고, 국민은 또 어떠한 고문(拷問)을 썼기에 일껏 결심하고 넘어온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쉽사리 변절하게 하였을까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작 이승만은 6·25가 터지자 즉각 대전으로 도망쳤다. 그는 서울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대국민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피란하지 말고 직장을 지키라고 말했다. 그래 놓고 나서 그는 또 부산과 거제도로 피신한다.
이승만 정부가 한강다리를 끊은 것은 6·25 발발 불과 72시간도 안 되어서였다. 민간인은 물론 수만의 국군이 한강 이북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은행 지하에 현찰을 그대로 두고 피란하면서도 형무소에 수감 중인 좌익인사들은 적출해서 사살했다. 반면에 화급한 경황 중에도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까지 챙겨서 풀어주었다.
이승만은 끝까지 휴전을 반대했다. 그가 반공포로를 무단으로 석방한 것도 휴전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반도에 26개의 핵폭탄을 쓰자는 맥아더의 주장을 지지했다. 전쟁이 끝나고 전작권을 돌려주려는 미국에 그는 극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권위주의 독재자 이승만의 모습
이승만은 민주혁명인 4·19에 의해 축출되었으니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처럼 여기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1947년 시인 서정주는 <우남 이승만전>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서정주가 쓴 이승만 전기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이승만이 읽어 본 다음에 불만을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1995년에야 한국출판협동조합에서 간행했다.)
“서정주라는 사람, 좋은 시인인가?”
“네. 보통 이상입니다.”
“그런 사람이 동양의 예의범절도 모르나?”
이승만은 자기와 자기 아버지를 경칭으로 호칭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을 정도로 권위주의적이었다.
돈암장 시절 이승만의 비서를 지낸 최기일(재미 경제학자)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 따르면 이승만 앞에서 대등하게 5분 이상 말한 한국인은 없었다고 한다. 상대가 말을 시작하면 이승만은 1~2분도 안 되어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자기 두 손을 상대방의 입에 갖다대고는 했다.
부인 프란체스카는 권위적인 데에다가 인색하기까지 했다. 돈암장 시절 그녀는 맘에 들지 않는 한국인에게는 나이와 직함을 가리지 않고 “이 방에서 나가요, 앞으로 오지 마세요” 소리를 남발했다. 최기일은 송필만이나 고희동 심지어는 안재홍 같은 신사들이 프란체스카에게 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34세 때 25세 연상인 이승만과 결혼한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원망의 대상이었다. 이를 테면 윤치영이나 임영신 같은 이도 “리 박사가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한국 여성과 산다면 좋을 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아쉬워했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두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이승만이 민주주의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1952년 당시 헌법은 대통령 간선제였다. 하지만 국회에서 세력을 잃은 그는 재선이 어려워지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냈다. 이 안이 거부되자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2명의 국회의원을 구속하는 등 온갖 편법과 불법을 동원하여 자기 뜻을 관철시켰다.
또한 그는 1954년 대통령 3선 제한 조항을 삭제하려고 개헌을 시도한다. 개헌에는 국회 재적 3분의 2인 136명의 찬성이 필요했는데 공교롭게도 1명이 모자란 135명이 찬성했다. 그러자 그는 국회 재적의 3분의 2는 135.333 명이므로 사사오입해서 135명이라는 해괴한 산법으로 개헌을 밀어붙였다.
엄정하게 말해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다고 할 수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가 독립운동가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불순했다. 다음으로 이승만은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애국·애족보다는 집권과 반공이 우선이었다.
반공주의는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없다. 그는 민주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아니었다. 이런 인물을 단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국부’ 운운한다면 그것은 기실 보수·우파에게도 이롭지 못한 일이다. 그것은 보수 우파 스스로 누워서 침 뱉는 행위밖에는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