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불문]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부처님은 나의 진실 생명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
[ 옮김 ] 시방과 삼세, 제망과 찰해에 항상 머무시는 일체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바쳐 귀의하오며 예배드리옵니다.
[ 풀이 ] 시방 세계에 두루 계시고 과거.현재.미래에 항상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제석천궁을 덮어 드리운 그물, 그 그물에 달린 구슬에 비춰진 구슬 그림자처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해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저 바다처럼 널리 두루 계시는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 해설 ]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구절도 부처님에 대한 예배를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시방삼세"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시방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동.서.남.북 사방과 동남.동북.서남.서북의 사유에다 상.하를 합하여 열 가지의 방향을 나타낸 말입니다. 또 삼세는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를 이르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시방은 공간적인 개념을 나타낸 말이고, 삼세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낸 말이 됩니다. 이 말은 곧 그 어느 곳에서나 그 어느 때라도 부처님은 항상 있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제망찰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제석천의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처럼 많고 바다같이 넓은 세계'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많다는 의미로 제망이란 말 을 많이 씁니다.
제석천에 펼쳐져 있는 그물에는 매듭매듭마다 영롱하고 투명한 구슬이 달려 있습니다. 그 구슬들은 이쪽 구슬이 저쪽 구슬을 비추고저쪽 구슬이 또 이쪽 구슬을 서로 비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개의 구슬 속에 주변의 모든 구슬들이 다 비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옆의 구슬도 다른 많은 구슬들이 그 구슬에 반사되어 서로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슬 구슬마다 구슬의 그림자가 서로 모두 비치는 것입니다. 그물에 달려있는 구슬도 엄청난 숫자이거니와 그 구슬에 비쳐 있는 그림자 구슬의 숫자는 또한 무한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와 같이 거듭거듭 다함이 없는 많고 많은 세계를 중중무진이라는 표 현을 씁니다. 이 말은 우주 삼라만상이 바로 중중무진하게 펼쳐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결국 중중무진하게 펼쳐져 있는 세계에 부처님이 항상 계신다는 뜻입니다.
제석천의 구슬에 비친 그림자 구슬처럼 많이 널려 있는 우주 공간에 부처님께서 두루 계신다는 불교의 세계관은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부처님의 우주관에 조금씩 접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근래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미국의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과학 연구소에서 <화엄 경>을 교재로 연구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엄경>안에는 화장세계(華藏世界)라는 부처님의 우주관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화장세계에 나오는 화장도는 인공위성 연구소에서 우주를 관측하여 그린 도표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삼천 년 전에 이미 혜안으로 중중무진한 우주 세계를 보신 것입니다. 천체 망원경이 아무리 발달하였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지혜의 안목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요즘음에는 과학과 불교를 접목시킨 책도 많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불교를 과학이 증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부처님의 위대성에 새삼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보다도 훨씬 큰 것들입니다. 태양계는 말할 것도 없고 무수한 은하계는 그야말로 '불가설 항하사 불찰미진수 무량수(不可說 恒河沙 佛刹微塵數 無量數)'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 삼라만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 세계에 부처님은 항상 계시는 것입니다.
마직막의 "불타야중"은 '모든 부처님에게'라는 뜻입니다. "불타"는 붓다.부처님이란 말이며, "야"는 '~에게'라는 위격조사이며, "중"은 '무리' 혹은 '많다'라는 복수의 뜻이 있습니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은 결국 '모든 공간과 시간을 다 채우는 많고 많으며 항상 계시는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여기서 부처님의 세 가지 양상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는 이유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에게는 세 가지 몸이 있다고 해서 삼신불(三身佛)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법신.보신.화신(法身.報身.化身)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말하자면 화신에 해당합니다. 화신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하나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진짜 부처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법신입니다. 법신은 오늘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있게 한 참 주인공인 것입니다.
삼신불을 쉽게 이해하자면, 법신불은 부처님의 본체적이며 내면적 인 것입니다. 또 화신불은 외형적이며 현상적인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합하여 우 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보신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세 가지 다른 모습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부처님께 기도를 하면서도 법당 안에 있는 등신불에게 하 는 것인지, 이미 삼천 년 전에 열반에 드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하는 것인지, 아니 면 보이지 않는 신에게 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하는 수가 많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석가모니 부처님이게 하는 진짜 주인공이 있는데, 그것이 법신입니다. 법신은 진리의 몸을 말합니다. 흔히 본래진면목. 진여. 주인공. 본성. 본체. 자성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법신 자리는 영원히 죽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몸 덩어리는 잠이 들어 도 법신은 자지 않고 항상 깨어 있습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바삐 움직여도 가만 히 있는 주체가 되는 것이 법신입니다.
한 가지 쉬운 예로, 우리가 법당에 앉아 공부할 때는 학생이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한 가정의 주부이고, 아내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법당에 있을 동안만 학생으로 살 아 있는 것이지 법당을 나서면 그때부터는 학생의 신분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변화와 관계 없이 본체는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며, 우리를 학생으로도, 주부로도, 아내로도 조종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팔십년간을 사셨다는 것은 마치 법당에 앉아 잠깐 공부하는 학생으로 머물러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비록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셨지만 법신불은 영원히 살아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자리는 그 영원히 존재하는 부처님의 법신 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행위는 부처님의 법신자리와 자신의 마음 자리를 맞닿게 하는 운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확히 제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본체와 자신의 본성이 하나로 일치되 게 기도를 해야 소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KBS를 듣고 싶으면 주파수를 거기에다 맞추어야 합니다. 엉뚱한 곳에 채널을 고정시켜 놓고 소리만 잔뜩 높인다고 해서 원하는 방송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소리가 낮아도 주파수만 제대로 맞추면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 자세도 그와 똑 같은 이치입니다. 자신의 마음에는 욕심이 가득한데 아무리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께 기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만행 만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며, 그 위대한 힘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의 충전 작업입니다. 전기를 충전시키려면 전기선에 꽂아놓아야 하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위대한 힘을 빌리려면 우리의 마음 자리를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신주파수에 정확히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단 한 번을 하더라도 오롯한 마음으로 정성드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석가모니 불상보다 법신비로자나 불상을 더 많이 모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신자리에 대한 이해가 과학적으로 납득이 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정신세계가 부처님의 법신자리와 바로 맞닿는다는 이론은 너무나 과학 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법신 자리는 우주 만유의 근원이며 본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신자리와 똑같음을 확인하려면 채널과 주파수를 정확히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같은 소리는 공명한다고 합니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 똑같은 주파수를 맞추어 틀어 놓으면 두 소리가 울리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마음 자세가 부처님의 법신자리와 채널이 맞아 떨어지면 공명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그 나름대로의 힘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흔히 자장 대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사물은 자장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신은 수억겁 동안 공덕을 쌓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엄청난 영향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 영향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신에 대한 이해는 올바른 믿음을 갖게 하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다음으로 화신불은 다른 말로 응신불(應身佛)이라고도 하는데, 역사적으로 인도에서 태어나 우리에게 법을 전하시고 열반에 드신 실존했던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법당에 조각해서 모셔 놓은 등신불이나 각 가정에 모셔 놓은 부처님의 사진 등은 모두 화신불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화신불을 통해 법신불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보신불은 흔히 공덕의 몸이라고 해서 공덕신(功德身)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삶을 살아가더라도 각자 쌓은 복덕과 지혜에 따라 그 영향력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의 영향력은 우리와 감히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전기로 비유하자면 우리가 겨우 자기 앞을 비출 수 있는 삼십 촉짜리 전기라면, 부 처님은 수억만 볼트가 넘는 엄청난 전기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인류를 다 비 추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삼신불을 달에 비유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법신불은 하늘에 항상 떠 있는 달을 말하며, 화신불은 천강유수 천강월이라고 하여 물이 있으면 어느 곳에서나 다 비 치는 물에 비친 달을 말하며, 보신불은 달빛을 말합니다.
삼신불도 중생의 이해 정도에 따라 그 비춰지는 모습이 각기 다릅니다. 달을 보는 데 있어서도 컵을 갖다 놓고 보면 컵에 비친 달은 아주 작지만 큰 바다에 가서 보면 달의 크기가 다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법신에 해당하는 하늘의 달은 항상 똑같은 크기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다 만 주위의 환경에 따라 달빛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자가 쌓은 복덕과 지혜에 따라 영향력과 역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보화비진(報化非眞)이라고 해서 보신과 화신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연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법신만이 영 원한 불생불멸의 존재입니다. 깨달음을 있게 하는 것도 법신자리요, 시방 삼세에 항상 있는 우주의 대 생명도 법신자리 입니다.
우리가 예불을 드리고 기도를 하는 것도 부처님의 참 모습인 법신에 대해 예배드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은 바로 법신불인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부처님은 자기 자신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지가 나와 같은 뿌리인 여야동근(與我同根)이며, 만물이 나와 같은 몸인 여아일체(與我一體)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과 이해가 생길 때 우리의 자각과 발심은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활하는 것을 한꺼풀 벗겨 놓고 보면 우주 만물이 하나로 꿰뚫려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참 생명과 자기 자신이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나 경전을 볼 때도 그러한 안목이 정립되어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이해가 되고 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삼신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이 모호해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할 때나 자성 자리를 찾는 참선 공부를 할 때도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에 대한 간계를 정확히 파악해서는 그 뿌리가 무엇인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로 우주의 본체입니다. 또 믿음은 자기 자신의 근원입니다. 믿음은 나아가 부처님의 한량없는 무량공덕과 자기 자신의 생명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법신자 리에 대한 신앙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불교의 생명이기 때문에 거듭거듭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
출처 :충북불교대학(용화사 부설) 원문보기▶ 글쓴이 : 광명(光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