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파를 단죄하던 반민특별재판부의 모습. 방청석이 인산인해를 이룬 것이 인상적이다.
혹자는 우리의 근현대 100년을 서양의 300년과 맞비교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격동의 한 세기였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해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숙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로부터 1년 뒤 우리는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식민통치 10년차인 1919년 고종황제가 덕수궁에서 비운의 삶을 마치자 이를 계기로 그 해 3월 1일 거족적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올해로 3.1만세의거가 일어난 지 90주년이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선언으로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고, 뒤이어 중국 중경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속속 환국하였다. 서대문 경교장에 거처를 마련한 백범 김구 주석은 새조국 건설과 통일정부 수립을 외치며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을 맞고 73세로 서거하였는데, 올해로 서거 60주기이다. 선생의 서거 20일 전인 6월 6일에는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특위를 사실상 무력화시켰으며, 민족적 염원을 담아 구성됐던 반민특위는 결국 그해 8월말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역시 꼭 60년 전의 일이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 3.1만세의거 90주년, 반민특위 60주년
반민특위는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 친일파 청산을 목적으로 구성한 국가 기구이다. 제헌헌법 제101조에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정부가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를 토대로 1948년 8월 5일 제40차 국회 본회의에서 김웅진 의원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을 긴급 동의안으로 내놓았는데, 이것이 해방 후 친일파 처벌의 첫걸음이었다. 표결에서 재적 155명 중 가(可) 105, 부(否) 16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으며, 그해 9월 7일 제59차 본회의에서 반민법은 재적 140명 중 가 103, 부 6으로 마침내 통과되었다. 반민법의 공소시효는 1950년 6월 20일까지였다.
반민법이 공포되자 국회는 후속작업으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구성을 서둘렀다. 우선 독립운동 경력자,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 등을 대상, 국회의원 가운데서 특위 위원을 선임하였는데, 초대 반민특위 위원장에는 임시정부에서 문화부장(현 문화부장관)을 지낸 김상덕 의원(경북 고령)이 선임되었다. 반민특위는 1948년 12월 23일까지 중앙에 중앙사무국, 각 도 조사부에 조사분국을 설치하여 골격을 잡은 다음 특별재판관 15인, 특별검찰관 9인, 그리고 중앙사무국에 조사관, 서기관을 임명함으로써 최종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입법 제안에서부터 법률 공포에 이르기까지 우역곡절 끝에 출범한 반민특위는 당시 돈으로 7천 4백만환의 예산을 타내 이듬해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실에 자리를 잡고 본격활동에 들어갔다. (* 이후 반민특위는 남대문로에 별도의 단독 청사를 마련하여 활동하였다)

1949년 당시 남대문로에 있던 반민특위 청사. 이후 이 건물은 국민은행 건물로 사용돼 왔다.
반민특위의 첫 성과는 1949년 1월 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 회신 사장 검거였다. 특위는 당시 박흥식이 미국으로 도피하려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종로 2가 화신 사장실을 급습하여 현장에서 박흥식을 체포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반민특위는 문화계의 거두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을 비롯해 직업적 친일분자 조병상(중추원참의, 종로경방단장), 경방 사장 김연수, 친일경찰 노덕술,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여자 밀정 배정자, 친일관료 김대우(경북지사), 공주갑부 김갑순(중추원참의) 등을 각지에서 속속 검거하였다.
이들 반민피의자는 서대문형무소나 마포형무소에 수감한 후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관들이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관들은 피의자에 대해 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이를 특별검찰부로 넘기면 이곳에서 기소 여부를 결정하였고, 기소된 자에 대해서는 특별재판부에서 재판을 통해 처리하였다. (참고로 특별검찰관은 국회의원 5명, 법조계 2명, 일반사회분야 2명 등 9명으로, 특별재판관은 법조계, 일반사회분야 등 총 15명으로 구성됐다.)
특위 검거 선풍 일자 이승만 정권 조직적 반격 준비
한편 반민특위의 검거 선풍이 회오리치자 친일세력들과 이들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극도의 불안을 느낀 나머지 조직적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특위 요원들 가운데 일부 친일경력자가 포함돼 있다는 등의 '흠집 내기'에 이어 특위 요원 암살음모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모두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이 해 5월 하순에 터진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승기를 잡은 친일세력들은 마침내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자”고 뜻을 모았다. 그리고는 6월 6일 아침 반민특위를 습격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6.6 사건’이다.
당시 반민특위는 남대문로(현 롯데쇼핑 맞은 편)에 있었는데, 관할서인 중부경찰서 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이날 아침 경찰은 출근하는 특위 요원 35명을 불법 납치하여 중부서에 감금하였다. 이 와중에 다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졌고, 설상가상으로 백범 김구 선생마저 안두희가 쏜 총을 맞고 졸지에 서거(6월 26일)하였다. 특위가 극도의 위기에 몰리자 특위 내에서조차 특위 운영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됐고, 급기야 특별법 개정론이 국회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법무장관직을 사임하고 국회로 돌아온 이인을 비롯하여 곽상훈 등은 1950년 6월 20일까지 규정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시키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국회가 어수선한 틈을 타 이 개정안은 7월 6일 국회를 통과하였고, 이에 김상덕 위원장 이하 초대 특위 위원 전원은 일괄 사퇴하였다. 김상덕에 이어 2대 위원장에는 이인이 선임되었는데, 이로써 8월 31일까지 한당 남짓 남은 반민특위의 앞날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끌려가는 친일파들. 가운데는 경방 사장 김연수, 마지막은 민족대표 33인으로 나중에 변절한 최린.
결국 2차 특위는 독자적인 조사활동은 벌이지도 못한 채 1차 특위의 잔무처리 수준에서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2차 특위가 활동을 마무리할 무렵인 1949년 8월 경에 나온 특위의 결정은 대개가 ‘무혐의’(무죄) 혹은 ‘불기소’였다. 경방 사장 김연수에 대한 무죄판결은 재판관 간에 의견차가 극심했었다. 김연수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서순영 3부 재판장이 무죄론을 주장하자 1부 재판장이었던 김병로(전 대법원장)는 “사회여론을 생각해서 무죄판결은 위험천만한 재판”이라며 재고를 요청하기도 했다.
1949년 1월부터 활동을 개시한 반민특위는 그 해 8월 31일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8개월동안 나름으로는 다양한 활동을 벌였지만 당초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 기간 동안 특위가 벌인 활동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특위가 문을 닫은 직후인 9월 10일자로 이인 2대 위원장이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활동기간 동안 특위가 취급한 친일파는 여성 6명을 포함하여 모두 688명이었다.
친일파들 '면죄부' 받고 풀려나...'친일청산' 민족적 숙제로 남아
이들 가운데 특위 중앙사무국에서 직접 취급한 경우는 절반에 가까운 326명이었으며, 나머지는 각 도 조사부에서 취급한 경우이다. 또 특위가 취급한 688명 가운데 특별검찰부에 송치된 반민피의자는 모두 599명이었으며, 이들 가운데 영장이 발부된 자는 408명으로, 이 가운데 체포된 자가 305명, 미체포된 자가 73명이었으며, 자수 61명, 영장취소 30명이었다.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자 가운데 특별재판부가 해체되기 전에 판결을 받은 자는 78명이었으며, 미결인 친일파는 215명이었다. 재판에서 최종판결을 받은 자들 가운데는 경찰 출신이 40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중추원 참의였다. 처벌내용을 형량 순으로 살펴보면, 체형(총 10명)을 받은 자 가운데 사형 김덕기(고등경찰), 무기징역 김태석(경찰, 중추원 참의), 징역 2년6개월 이기용(귀족), 징역 2년 이성구(면 서기, 징병자 부친 구타, 사망시킴), 징역 1년6월 조병상(중추원 참의), 징역 1년(총 5명) 김갑복(청주경방단 부단장, 공출/ 징용 적극 협력) 등이다.
또 이병길(습작, 이완용 아들) 등 9명은 집행유예를, 파인 김동환 등 23명은 공민권 정지를, 김연수, 박흥식 등 17명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또 고문경찰 박종표 등 9명은 형 면제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변절자인 최린, 친일경찰 노덕술 등 8명은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상징적인 친일파들의 대다수는 ‘면죄부’를 받고 풀려나고 말았다. 결국 민족적 염원을 안고 출범한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책동으로 중도에 절름발이가 돼버렸고, 친일파 청산은 이후 민족적 숙제로 남게 되었다.

반민특위 와해를 풍자한 만평(경향신문, 09.1.9)
* 이 글은 최근 필자가 펴낸 <풀어서 쓴 반민특위 재판기록>(도서출판 선인 펴냄, 전 4권)의 보도자료용으로 썼던 글을 일부 가필한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http://v.daum.net/link/3884819
※ 본 글에는 함께 생각해보고싶은 내용을 참고삼아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언론, 학문' 활동의 자유는 헌법 21조와 22조로 보장되고 있으며, '언론, 학문, 토론' 등 공익적 목적에 적합한 공연과 자료활용은 저작권법상으로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79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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