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삽시다

[딴지일보]우리들에게 던지는 세 가지 질문

hognmor 2009. 7. 24. 12:38

[딴지일보]우리들에게 던지는 세 가지 질문
번호 75123  글쓴이 산.들.바람 (ikaco)  조회 221  누리 76 (76/0)  등록일 2009-7-24 12:00
대문추천 7 [정치개혁] 
 

 

원저자의 서문 일부를 생략하고 바로 펌 했습니다.
속에서 부글거리는 무엇을 글로 옮겨보려다가....
능력의 한계를 느끼던 차에 만나게 된 주옥같은 글 이라고 느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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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논설위원 파토 (patoworld@gmail.com)
트위터 : patoworld

 

우리의 슬픔과 죄책감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할 필요도 이제는 없을 것 같다. 다들 많이 느꼈고 또 지난 주말 안장식 기사(링크)를 통해 서로의 감정과 느낌들을 다시 나누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내게 지금의 이 국면을 타개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묘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생각해 온 것들은 있지만).

그래서 일종의 단상 비슷하게, 노무현 서거를 통해 명료해진 우리 사회의 특정한 상황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 자신과 열분들께 간단하지만 심각한 질문 몇 가지를 던져 보려 한다.

이 질문들이 얼마나 와 닿을지는 아마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쩌면 아무 공감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서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질문들이라 여러분과 나눠 보지 않고 이 긴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지 싶다.


 



노무현 서거가 우리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주장과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사회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나는 이 사건이 기존의 진보/보수의 구도를, 민주/반민주 구도마저 넘어서서 인간의 ‘격’과 그에 따른 선악의 구분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통해 노무현은 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또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를 평가하는 일종의 기준점으로 그 의미가 변해 버렸다. 다시 말해 노무현의 죽음에 어떻게 반응했냐에 따라 그 인간의 기본 성향과 됨됨이를 저울질하게 되었다는 거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이런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선거에서 이회창이나 이명박을 찍었다고 해서 반드시 극우도 아니고, 한나라당을 지지한다고 꼭 반민주인 것도 아니다. 반대로 노무현이나 민주당을 찍었다고 해서 반드시 진보도 아닐 것이다. 원래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서 대중은 언제나 다소간 모호한 지점에 있고, 자신의 이익을 따라 변해 가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 입장이 다르다 한들 토론하고 논의하고 아쉬운 대로 합의점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노무현 서거 이후는 좀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이제 노무현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느끼고 행동했냐에 따라 그가 어떤 세계관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는 인간인지가 가늠되기 때문이다. 일부러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어 버리는 거다.

정치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Pro 노무현과 Anti 노무현의 두 종류로 사람을 구별하게 된 건데(한글로 번역하면 ‘친노’와 ‘반노’가 되겠지만 특정한 정치적 의미로 쓰이던 표현이라 이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그리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바람직하던 아니던 그게 지금의 현실이다.

Pro 노무현의 정점에는 딴지일보도 있고, 무엇보다 전국 각지의 분향소를 찾은 500만 국민의 대부분이 포함된다. Anti 노무현의 정점에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필두로 하여 조갑제 김동길 등의 인사와, 또한 노무현의 서거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 상당수의 국민들이 역시 그쪽에도 있을 것이다(정확히 어느 쪽이 다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노무현이라는 기준점이 과거의 보수/진보, 민주/반민주 등의 기준과 다른 점은, 비록 그것들과 상당한 교집합을 갖고는 있지만 이런 이념이나 정치적 지향에 비해 훨씬 강렬하고 비장한 무엇이라는 점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 느끼고 있는 대로 말이다.

그것은 물론 사람의 죽음, 그것도 전직 대통령이자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적 인물의 죽음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노무현은 정치나 민주주의의 상징을 넘어 인간성의 상징으로까지 승화되었다. 약자에 대한 연민, 박해 받는 자를 돕는 정신, 권위를 버리려는 자세,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단, 국민 주권에 대한 철저한 원칙… 그런 것이 바로 노무현이 상징하는 덕목들이다.

결국 우리는 그의 죽음을 통해 정치인 노무현이나 전직 대통령 노무현 대신, ‘감히’ 대통령에까지 올랐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 노무현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그의 죽음을 조장한 우리 자신에게 분노하고, 우리보다 훨씬 냉정하고 비열하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 혹은 그의 삶 속에서 아무런 인간적인 의미나 아름다움도 발견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현상만으로 그의 삶과 죽음 전체를 비웃는 이들에게는 더욱 분노하게 된다.

까놓고 이야기하자. 이렇게 하여 이제 이 사회는 ‘우리’와 ‘그들’로 나뉘어져 버렸다. 물론 중간에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경계선은 과거에 비해 확연히 선명해져 있다. 제 아무리 정부가 국민 화합을 외친다 한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거다.

노무현 서거 이전이라면,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에 대해 서로 입장이 다르다 한들 술자리에서 한 잔 기울이며 말싸움이나 하고 다음 날에는 털어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김동길이나 조갑제가 했듯이 지금 누군가가 노무현을 면전에서 비하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 자리에서 견디고 앉아 있을 것인가. ‘돈 먹고는 검찰이 조여오니 무서워서 자살한 천하의 소인배’ 같은 말을 듣고 그저 참고 있는 게 가능한가.

이런 현실에 기초하여 내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이거다.

우리는 과연 저들과 화해해야 하는가?



이 땅이 이렇게 둘로 나뉘어진 시대는 사실 소위 말하는 ‘해방공간’ 이후 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1945년에서 48년에 이르는 3년간, 우리 사회(남한)는 좌파와 우파로 확연히 분할되었다. 당시는 이후의 ‘반공 시대’ 와 달리 좌우 중 어느 쪽이 옳다는 사회의 지향이나 기준 자체가 빈약하던 시절이다. 물론 나라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건국의 전야를 앞두고 이제 나라를 세워야 하는 입장에서 좌와 우의 신봉자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광신적일 정도로 투철했고, 그런 두 진영의 세계관은 도저히 화합하기 힘들 정도로 상반되고 적대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호간에 대한 테러와 암살로 이어졌다.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 그리고 시민이 다치고 죽었다.

그렇게 좌와 우는 이 땅에서 결국 화해하지 못했다. 남에서는 우가 좌를 죽이고 가두고 소멸시켰으며, 북에서는 반대로 했을 뿐이다. 그렇게, 물론 역사의 다른 맥락들도 크게 작용을 했지만, 우리나라는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고 둘로 갈라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우리 근대사의 현실이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평소에는 잊고 사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그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똑같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국민이 그때처럼 철 없는 상태도 아니거니와, 당시나 비슷한 시대착오적 우익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때 같은 좌익은 더 이상 남한 땅에 없다(이명박 정권이 무슨 억지를 써도 없는 건 없는 거다. 촛불 들고 나온 아줌마가 빨갱이가 아닌 한 말이다).

그리고 그 시절처럼 서로 테러를 하고 암살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들이 다시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큰 덩어리의 국민들이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지점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감정의 앙금과 상처가 그 사이에 가로 놓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면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적합하고 평화롭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다시 찾아 오는 것이 지상 과제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다음 대선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눈에 보이는 방법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은 이미 과거에도 있었지 않았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것이 바로 그 일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고, 극우 꼴통 기득권 보수 깡패 세력은 이제 꼬리를 내리고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거라고, 정도 차이는 있지만 다들 어느 정도는 기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의 결과는 그것이 우리의 순전한 착각이었을 뿐이라는 점을 명확히 증언하고 있다. 저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똘똘 뭉쳐 잠시 엎드려 버텼을 뿐이다. 그 세월 동안 조금도 배우거나 반성하지 않고 이를 부드득 갈며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 머리와 가슴 속에는 아직도 박정희 전두환의 두뇌와 영혼이 버젓이 살아 있다.

이런 저들, 인간보다 물질이 앞서고 원칙보다 이익이 앞서는, 바로 그렇기에 세속적인 힘을 모으고 지킬 수 있는 자들. 그 힘을 잃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기에 기득권자의 근성을 결코 떨칠 수 없는 그들.

그들에게 우리는 지배의 대상일 뿐 이해와 나눔의 동반자가 아니라는 점이 이번 노무현 서거 사건으로 명백해 졌다(촛불에서 이미 거의 확인되었지만). 대선에서 이긴다고 해도 그것이 승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는 것도, 자칫하면 우리는 다시 이런 식으로 당하고 말 지도 모른다는 점도. 이미 충분히 봤듯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덤벼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는 내가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이다.

우리가 원한다 한들, 그들과의 진정한 화해는 정녕 ‘가능’할 것인가?



노무현의 장대한 정치 실험은 죽음이라는 최악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저 실패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노무현 본인이 주인공이던 1막은 분명히 끝났다.

우리는 지금, 과연 화해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화해가 물리적으로 가능한지도 분명하지 않은 그들과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같은 민족으로 국민으로 시민으로 이웃으로서 저들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나는 이번 일을 통해 그들과 우리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가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비록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은 다른 뜻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의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을 향해 나아가면서 불행한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그들의 행복은 현재 행복한 자들이 더 행복하기 위해 불안 요인을 제거한다는 뜻이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주권자가 될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그들의 민주주의는 힘과 능력을 가진 자들이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계속 통치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잘 사는 나라는 국민 개개인이 다 같이 잘 살게 되는 곳이다. 하지만 그들의 잘 사는 나라는 원래 가진 자들이 더 많이 벌어들여 그저 국민 총생산이 높아진 곳일 뿐이다.

이 속에서 과연 노무현의 뒤를 이어 이 땅에 사람 사는 세상의 2막을 펼치는 것은 가능할 것인가.

앞에도 말했지만 테러를 할 수도 없고(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거꾸로 우리가 그들을 지배하려 들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는 순간 우리는 노무현의 정신은 물론 우리 자신의 정당성과 인간성마저도 잃게 된다.

생각해 보면 그들의 승리는 쉽다. 수단과 방법에 별로 구애 받지 않고 목표를 완수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5.16에서부터 광주를 거쳐 이명박 당선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서 반칙과 협잡, 사기와 은폐의 냄새가 그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어렵다. 수단과 방법이 목표만큼이나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의 윤리성을 따져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밉다고 해도 상대를 제거하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타락한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이다.

저들을 끌어안으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갈 방법은 과연 있는가?



혹자는 나의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과격하다, 혹은 분열주의라며 비난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질문들은 실은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던지는 것이라는 점, 본지 독자들이라면 아마 눈치채셨을 거다.

사실 마지막 질문은 노무현이 실현하려고 했던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 내려놓은 권위는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와 자신의 목숨을 잃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에도 한번 썼지만 노무현은 아무도 다치지 않는 혁명을 꿈꾼 극한의 이상주의자였다. 물론 원칙적으로 그 길이 옳다. 그러나 세상이 다시 이렇게 돌아오고 그 주체가 죽는 일이 재현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얼마나 먼 것인가. 인간성이 스스로를 타락시키지 않고 승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증오와 사랑이 교집합으로 융화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과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위의 세가지 질문을 앞으로의 화두로 삼으려 한다. 가슴 한 구석에 비수를 품는 대신 작은 오리나 한 마리 품고서. 여전히 평소처럼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하지만 때가 오면 그때는 싱거운 웃음은 잠시 걷고 옳음이 그름을, 인간이 물질을, 현명함이 어리석음을, 민주가 독재를, 진실이 거짓을, 눈물이 냉소를, 희망이 공포를 이겨내는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사람이고 싶다. 이것은 지난 49일 동안 내가 졸졸 쫓아다닌 노무현 대통령께 보내는 작은 약속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그 7주간. 나는 많이 변한 것 같다. 그 변화들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건강하고 현명한 힘으로 내 속에서 자라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인사 한 마디 하고 긴 취재의 여정을 마치련다.

감사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논설위원 파토 (patoworl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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