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이학박사, 전 동국대교수 겸 학장
제민일보를 통하여 '의귀에서 거행된 감목관(監牧官)행사'를 확인하게 됐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행사'임으로, 주민들의 관심을 모을 것은 당연하다. 산세(山勢)와도 관계되는데, 섬 한가운데에 '한라산이 솟아'있고, 바다를 향해서 '고도가 낮아진 모습'이다. 이런 지형조건에 따라, 중-산간에는 '환상(環狀)의 초원대(grassland)'가 조성됐고, 이를 목축지대로 활용해왔다.
말과 소는 초식(草食)동물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 육성을 위해서는 '초지(草地)를 전제'하게 된다. 여기에다 말은 '교통수단과 군사용으로 활용'해왔으며, 본격화시대는 '몽고(蒙古)의 침입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몽고(원나라)는 고비(gobi)사막주변의 초원지대에 기반을 두어왔다. 그런 까닭에 초식동물에 근거한 '기마(騎馬)부대는 상징물'이 되어왔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충렬왕3년에 원설목마장(元設牧馬場)'이란 글귀가 나온다. 원나라의 간섭시대를 통하여 '제주도에 목마장이 설치되어온 것'을 뒷받침한다. 설치사유도 원나라의 '초원지대와 유사(similarity)환경'이면서, 자신들이 필요한 '원둔(元屯)마의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다 목마에 주력하는 '다루하치(達魯花赤)의 직책'까지 두었음으로, 이것이 '목마문화를 흥융'하게 만든 배경이었다.
이때를 기해서 제주도에는 '10개목장이 설치'됐는데, 송당(松堂)에 자리한 1소장을 시작으로 '천미장중심의 10소장(所場)'에 이르는 분할로 이어졌다. 이런 전통과 관리체계는 '조선왕조시대로 전승'되면서, 관리책임자로서 감목(監牧)관을 두게 됐다. 최초감목관은 김검용(金儉龍)인데, 태종원년에 훈련도감을 지냈다. 그러다가 '제주감목관으로 내려온 것'을 보면, 왕자(王子)난에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경주(慶州)김씨의 입도(入島)시조'이면서, 이후 감목관집안의 전통'을 이어왔다. 김만일에 이르러 '헌마(獻馬)공신의 명예'까지, 얻어내게 됐다. 어마(御馬)와 군마사육에 주력해왔음으로 '국가에 헌신해온 공로'를 높게, 평가해온데 따른 것이다. 오늘의 의귀에서 '목마(牧馬)와 관련된 복고풍행사'를 펼치는 것도, 감목관후손들의 정착으로 '동족부락을 형성해온 사실'과 관계된다.
경주김씨의 정착시조는 '천미천주변의 목장'을 근거로 삼아왔다. 이곳을 거점으로 분파(分派)가 이루어졌는데 '인접한 수망'에는 동족비율이 현재60%에 이르는 한편, 신효의 경우 42%에 이른다. 공통점으로 다가온 것은 마을마다 '감목관후손들이 집결'해온 점이다. 이제 헌마공신을 앞세운 행사도 '김문(金門)의 명예'이면서, 제주도가 갖는 자부심이 됐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을 향한 준마(駿馬)의 수송과정'에서, 관련지명을 확산해왔음으로 '제주도의 자부심'을 앞세워온 근거가 됐다. 구체적 사례로서 전남의 강진에는 '말이 머물렀다'는 뜻으로, 마량(馬良)면이 있고, 서울에는 '말을 메어둔 장소'란 뜻으로, 마장(馬場)동이 등장한다. 이런 사례에 근거하더라도, 자부심을 가지면서 '거도(擧道)적인 목마축제'를 병행하는 것이, 마땅하게 됐다.
이를 위해서 "탐라순역도"에 게재된 '산장구마(山場駒馬)를 복원'하는 일도, 필요하게 됐다. 또한 '송당과 천미(川尾)장을 결합'시켜, 당대의 목사-감목관-현감이 참석하는 '행사재현도 필요'하게 됐다. 이를 위한 공익사업으로 '시대에 부합되는 목장복원'과 더불어, 관광과 연계된 '사업골격(scheme)도 앞세우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