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내고향

호근마을 : 각시바위에서 바라본 삼매봉과 범섬 사이에 있는 우리 마을

hognmor 2009. 1. 3. 12:45

  

 고궁산(고근산)에서 본 호근마을 전경, 멀리 삼매봉과 서귀포시가지, 섶섬도 보인다.

 

  호근마을의 자연환경과 설촌유래

 

1. 자연환경

  호근(서호)마을 바닷가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백록담의 세 부악(釜岳)과 <새통어이> 깊은 계곡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인다. 마을 북쪽에는 백록담에서 남쪽으로 급경사면 중간에 시오름이 앉아있고 그 아래로 완경사면 끝자락에 각시바위(학수암)와 고근산(고궁산)이 우뚝 서있다. 마을은 바닷가까지 경사지를 이루고 있어 불칸동산, 솔왓동산, 상뒤동산, 막동산, 유리왓동산과 같은 동산이란 지명이 널려 있고, 외돌개에서 속골 사이의 갯바위는 높은 절벽(기정)을 이루고 있어 한라산 분출 용암이 우리 마을을 따라 빠르게 바다로 흘렀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형성된 지역이다 보니 마을 주민들은 메와진돌, 벤돌, 거문머들과 같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돌투성이인 밭이고 면적이 좁은 밭인 돌렝이나 계단식 밭인 살레(찬장의 제주어)왓(밭의 제주어)을 일구어 농사지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2. 설촌유래

  호근마을 서당 훈장을 지낸 허은(許垠)의 호근록(好近錄,1927)에 따르면 好近마을의 好(좋을호)는 虎(범호)가 바뀐 것이고, 원래 호근마을은 큰가름(수모루에서 서남쪽으로 법환리 사이의 지명)에 있었으므로 범섬에 가깝다는데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점차 큰가름(큰마을)과 이웃한 통물, 원통, 너분이왓, 염돈 등의 조근가름(작은마을) 주민들이 어우러져 지금의 호근(서호)마을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호근록은 조선개국 3년(1394)에 고려 말 정당문학을 지낸 조원이 현 서호마을회관 인근에 터를 잡아 그 8세손에 이르러 망하니 양천허씨가 장가들어 그 터에 살았다고 쓰고 있어 호근마을의 설촌 시기를 짐작하게 한다. 1707년 3월에 만든 차일장입참책록(遮日帳入參冊錄=장례식장막계참가자명부)에 차일장에 참여한 마을 주민 51명의 성씨를 보면 金씨 17명, 高씨 8명, 許씨 6명, 吳씨 5명, 玄씩 5명, 康씨 3명, 韓씨 2명, 肖씨와 奴씨, 洪씨, 李씨, 宋씨가 각각 1명으로 나타나 당시의 주민 분포를 짐작하게 한다. 호근마을은 1892년 주민들 간의 불화로 호근리와 신호근리로 분리되었다가 1900년에 합쳐졌으나 1903년 또다시 분리되었는데 위로는 바가잣도에서 아래로는 통물까지를 경계로 동쪽은 호근리, 서쪽은 서호리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호근모르 택호에 대하여.hwp

 

 

 호근마을 복지회관(2008년 7월에 개관)

   

호근동 포제 봉행 역사와 포제 봉행 절차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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