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바위 : 한라산 앞에서 우리마을을 지켜서있는 학수암(각시바위)
나의 부모님이 살아오신 이야기
나의 아버님은 김신학(향윤), 어머님은 김순효(옥순)이시다. 나의 아버님은 1911년에 서홍리에서 태어나 9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님을 따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예촌(신예리) 외가에 가서 몇 해 지내다가 어머님이 재가하게 되자 15살 되는 해에 일본에 가게 되었다. 아버님은 먼저 일본에 가 있는 삼촌들(현숙, 승호 할아버지)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삼촌들은 아버님께 도움을 주기보다는 아버님이 모은 돈을 뜯어가기나 하더라며 섭섭했던 말씀을 하셨다. 아버님은 일본에서 처음 유리 공장에서 일을 하셨고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히고 일본 생활에 익숙해지자 공장 주인이 자기 딸과 결혼할 것을 권하기도 하더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러나 일본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장에 화재가 나서 기계들을 밖으로 옮기는 과정에 너무 무거운 것을 억지로 들어 옮기면서 병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목에서 피가 계속해서 나와 폐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 완쾌되었으나 그 동안 모은 돈은 병원비로 다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22살 되는 해에 귀국을 결심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호근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함자가 인옥(仁玉)이시고 할머니는 친정이 예촌이고 양씨이시다. 두 분은 구갠드르(호근리 1729)에서 살다가 서홍리로 큰 밭을 사서 이사를 하였는데 우영(삼밭)이 자그마치 두섬지기(30마지기=4,500평)나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아버지(나의 할아버지)는 신체가 건장하여 산남 지역에서는 씨름을 하거나 듬돌들기에 당할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호강에 겨워 아버지의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아버지의 어머니를 눈물짓게 했고 그러다가 아버지가 9살 되는 해에 28살의 젊은 나이로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서홍리에 이사 간 후 표고버섯과 약초 등을 사서 육지로 싣고 가 파는 장사를 했는데 한 번은 대량으로 약초 등을 싣고 육지로 가는 과정에 장사가 금지된 약초가 문제가 되자 싣고 갔던 약초들을 모두 배에서 바다로 던져버렸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옥살이를 하고 돌아오게 되었고 이 때 약초를 사면서 외상하고 빌렸던 돈들을 갚으려니 재산을 모두 처분해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제사 때 쓰는 그릇(제기)만은 새집(상철이 증조부네 집)으로 몰래 옮겨서 보존할 수 있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까지는 그 제기들로 제사지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화병에 걸려 목에서 피를 토하며 고통스런 날들을 지내야 했다고 한다. 이 때 보천교가 이 지역에 전파되고 있을 때인데 병을 얻어 고생하는 할아버지에게 보천교를 믿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에 보천교를 믿게 되었고 부등개(지금의 한남리)로 이사를 가서 몇 년 동안 살다가 방고령(지금의 신흥리 북동쪽)으로 이사 가서 북향집을 세내어 사는 것을 나의 어머니가 가서 본적이 있다고 한다. 그 후 할아버지네는 호근리로 돌아왔는데 호근리 1733번지 지금은 돌아가신 고지준(광운이 아버지)선생네 우영에 가운데가 부엌이고 양옆에 방을 꾸민 막사리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가 시집왔을 때도 할아버지의 병환이 나아지지 않아 약초를 캐어다가 봄에 산에서 녹지 않고 남아있는 얼음을 담아다가 약초를 얼음에 담아 약으로 쓰면 좋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했는데 며칠 후 꺼내어 보니 썩어서 약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가 시집을 오게 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복순이네 집 밖그레(바깥채)를 얻어 이사가시고 아버지의 어머니가 예촌서 오게 되었고 아버지 내외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나의 어머니는 3살 되던 해 음력 3월 4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 음력 1월 14일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되자 여우내 외가에 가서 살다가 18살 되는 해에 호근리로 시집을 오셨다. 어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처음은 돈오름(세화)에 살다가 덕두캐(표선면 삼덕리)로 집을 사서 이사를 했는데 4년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음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사람들은 삼살방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가 나의 어머니는 3살, 외삼촌은 9살(김여남, 후에는 재욱), 이모(이정희, 어머니와는 아버지가 다른 언니였다. 물도왓에 살다가 일본 대판에 살면서 한 동안 편지도 오가고 호근리에도 내가 중학교 때에 다녀가셨다. 그 때 갖고 온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던 게 생각난다.)는 13살 때인데 덕두캐 집이 바닷가에 바짝 붙어 있어서 동네 아이들과 어머니가 노는 것을 보고 잠깐 이모가 어딜 다녀왔는데 어머니가 바닷물에 떠내려가 아이들이 꺼내려다가 파도가 치면 놓쳐서 점점 멀리 떠내려가는 것을 이모가 보고 그 즈음 서툴게 배운 헤엄을 쳐서 어머니를 꺼내어다가 죽은 줄 알고 업지르고 뒤집기를 반복하며 울부짓다보니 살아났다고 한다. 그 해 겨울에 어머니의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외삼촌은 여우내 외가에 가서 살았는데 어머니가 16살 되는 해에 어머니의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외사촌 오빠네(고경관, 호근리 나의 고모할머니와 결혼, 이게 인연이 되어 나의 어머니가 나중에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 됨) 아기들을(첫째는 하욱인데 일본서 살다가 젊어서 사망, 희욱, 기욱) 돌보면서 살다가 어머니가 18살 되는 해에 호근리로 시집을 오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첫 해에 거문머들 밭을 빌려 모래를 실어다가 거름으로 뿌려 제충국 농사를 했는데 풍작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해에 이전에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파산하면서 진 빚의 일부를 갚지 못하고 차용증서를 써준 것이 있어 서홍리 변씨 노인(얼굴이 둥굴 넙적하고 눈이 부리부리한 거인이었다 함)이 자꾸 할아버지를 찾아와 빚 독촉을 해오던 터라 제충국을 팔아 처음 손에 잡게 된 돈으로 그 빚을 갚아버리지 않고는 돈을 벌어봐야 그 빚을 갚는데 다 들어갈 것이라 생각되어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대동하고 서홍리 변씨 노인을 찾아가 원금에 못 미치지만 이 돈을 받고 차용증서를 돌려주지 않으면 앞으로 이 곳에 살면서 꾼 돈을 갚을 능력이 없으니 그리 알라고 엄포를 놓아 차용증서를 받아내어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날아갈듯한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그 다음부터는 할아버지가 아버지 말이면 무엇이든 기꺼이 수용하시더라고 한다. 그 다음해에는 제충국을 수확했는데 장마가 오래 계속되어 말리지 못하고 썩어버려 돈을 벌지 못하였으나, 그 전에는 일일이 열매를 손으로 털어야 했었는데 처음으로 탈곡하는 틀을 사서 탈곡을 하게 되니 그렇게 수월할 수 없더라고 한다. 그 다음은 고구마 농사를 했는데 농사가 어찌나 잘 되었는지 그 해에 처음으로 밭을 사게 되었는데 그게 생물골(생목골) 고지준 선생네 밭이었다. 이 밭은 내가 중학교 때 팔아 그 돈으로 강정 논을 2000평 사는데 썼다. 그 논을 살 때 형님네는 땅고아진밭을 팔아 붙였다. 그 논을 사러 나는 100원 짜리 이순신 장군이 그려진 파란색 종이돈을 100개씩 묶은 다발 330개를 보자기에 싸서 질머지고 아버지를 따라 도순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고, 그 논에서 수확한 쌀과 볏짚을 화물차에 가득 싣고 뿌듯한 기분으로 집으로 오던 추억이 되살아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딸을 둘 낳았는데 첫째는 수동이로 9살 되는 해에 병으로 죽었고, 누님(정선, 창하 어머니)을 낳는 해에 지금 형님네 집터(호근리 1273번지)에 집을 지어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은 남향집으로 지으려다가 소섬(우도)에 사는 지관일을 보는 교인(아버지와 같이 증산교를 믿음)의 말에 따라 서향으로 부엌과 방, 마루와 방의 4칸 구조의 집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 누님(정선) 다음의 딸이 태어났으나 3살 되는 해에 죽고 해방되기 전 해에 형님이 태어났다. 그런데 이곳에 이사오기 전에 증산교 신자들이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죄목으로 아버지의 할아버지를 붙잡아가 5년 동안 징역을 살게 되었는데 해방이 되자 풀려나 오게 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오신 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지난 때여서 할아버지는 할머니 임종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다음해에 아버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후 몇 년 없어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부산 사는 누님이 태어났다. 그 이듬해에 제주 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사건인 4.3이 일어나 아버지는 낮에는 군경에 시달리고 밤에는 무장대에 시달리는 삶을 3년 동안 살아야 했다. 군경이 우리 마을을 초토화하는 시기에는 각시바위 동굴에 숨으러 가기도 했는데 군경이 사격을 하면 총알이 각시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리고 가슴을 조리게 하더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부산 사시는 누님의 뒤를 이어 남자아이가 연이어 태어났는데 봉옥(세살 때 죽음), 몇 달만에 죽어 이름도 짓지 않은 아이, 그 다음이 나(종호)이고, 한참 후에 막내 딸(일선, 충제 엄마)이 태어났다.
그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시고 절약하는 생활로 재산을 꾸준하게 일구었으니 맨 처음 산 생물골 밭 이후에 땅고아진밭, 돔베낭골밭, 거문머들밭, 비케왓, 구시물, 종나물(이를 팔아서 구시물 과수원 서녘밭과 우녘밭을 삼), 돗새 에움(이를 팔아서 지금 창하네 과수원인 홍리목장밭을 삼), 지금의 우리 집터와 형님네 집터, 원통밭 등을 샀으니 지금 우리 형제가 어느 정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동안 고생하신 결과임을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