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60조선의 왕 중에는 존재감이 거의 없는 왕이 몇 있는데 현종(顯宗, 재위 1659∼1674)도 여기에 속하는 것 같다. 오늘의 한국인들은 1,300년 전 당나라 현종(玄宗)은 알아도 300여 년 전 조선의 현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반면에 현종 다음 왕인 숙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런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인지? 당나라 현종과 조선의 숙종은 각각 양귀비, 장희빈이라는 여인과 일종의 스캔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이와 달리 평생 후궁을 들이지 않은 조선의 현종에게는 스캔들이 전혀 없다. 이런 사실들은 한국인들이 과거의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의 부정적인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또한 오늘의 한국인들은 조선의 현종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현종 때 진행된 예송논쟁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본 바가 있다. 그리고 예송논쟁이란 쓸모없는 소모적 논쟁에 불과하며 그것은 당파싸움의 수단과 구실로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과연 그런 것일까?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붕당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사실이다. 서인과 남인이 두 차례에 걸쳐 벌인 이 논쟁이 대단히 첨예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논쟁이 첨예했던 이유는 당파싸움 때문이 아니라 논쟁의 주제 자체가 매우 중차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1차 논쟁은 ‘아들이 죽었을 때 어머니가 상복을 3년 입어야 하나 1년 입어야 하나’의 문제였고, 2차 논쟁은 ‘며느리가 죽었을 때 시어머니는 상복을 1년 입어야 하나 9개월 입어야 하나’의 문제였다. 얼핏 보아 무익하기 짝이 없는 논쟁처럼 보이는 이 사안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1차로 효종이 죽었다. 효종은 인조의 차남 봉림대군이다. 인조에게는 장남 소현세자가 있었는데 일찍 급서했다. 때문에 봉림대군이 후임 세자가 되어 효종으로 등위한 것이다. 이 경우 살아 있는 효종의 어머니(계모)에게 효종은 장남인가 차남인가? 장남이라면 3년, 차남이라면 1년을 입도록 되어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2차로 효종비가 죽었다. 역시 효종비는 살아 있는 시어머니에게 맏며느리인가 둘째 며느리인가? 맏며느리라면 1년, 둘째 며느리라면 9개월을 입도록 되어 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전히 “뭐시가 중헌디?” 하고 고개를 갸웃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조선이 아무리 예법을 중시한 나라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 명분에만 치중한 논쟁이 아닌가? 이 따위 것을 놓고 붕당 간에 사활을 건 논쟁을 벌이다니?
하지만 이 상복 논쟁에는 인조의 차남이었던 선왕 효종의 정통성 문제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이 논쟁의 본질은 아니었다. 이 논쟁에는 정치적, 철학적 주제가 함의되어 있었다.
효종은 차남이다. 동시에 그는 형식상 적장자가 되어 왕위를 계승하여 다음 왕이 된 사람이다. 이 경우 왕은 사대부의 일원인가 아니면 사대부 이상의 특수한 존재인가? 왕도 사대부의 일원이라면 상복은 3년이 아닌 1년을 입어야 한다. 제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차남은 차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조선의 정치체제가 ‘군신협치’인가 아니면 ‘왕권우선’인가의 문제가 걸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중대한 논쟁거리이고, 당시의 왕과 사대부들은 이에 대해 철저히 난상토론(爛商討論)을 벌인 것이었다. 조선은 가히 ‘토론의 나라’였다. 조선의 왕과 사대부들은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원시키는 역사 토론을 240년 이상 벌였다. 조선 최고의 복지정책으로 평가 받는 대동법 토론은 10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퇴계 이왕과 고봉 기대승은 사단칠정론을 놓고 8년 동안 편지 토론을 했다.
사실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의 문제만 보면 하찮은 것이다. 3년인들 어떻고 1년인들 어떤가? 또한 1년인들 어떻고 9개월인들 어떤가? 놀라운 것은 이런 논쟁이 철저히 명분과 실리의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결론지어졌다는 점이다.
현종은 1차 논쟁에서 ‘왕도 사대부의 일원’이라는 서인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2차 논쟁에서는 왕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남인의 주장에 손을 들어 주었다. 이로써 현종은 두 정당의 균형을 도모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중대하고 예민한 논쟁에서 단 한 사람도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따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각성을 준다. 유럽과 미국의 ‘디베이트(debate)’는 매우 세련된 토론이라고 하면서 조선의 예송논쟁을 무익한 당파싸움이었다고 치부하는 것은 모순이다. 역사적 무지, 서양 선망, 조선 폄하 등은 우리가 화급히 척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역대 최고의 인군(仁君), 조선 현종
- 후궁이 없었다는 것도 비틀어 보는 우리의 조선사관
인군이란 ‘어진 군주’를 말한다. 어질다는 것은 선량한 감수성을 지녔다는 뜻으로서, 군주가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의 현종(顯宗, 재위 1659∼1674)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가 범상치 않을 정도로 어진 군주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현종이 세자로 있을 때 궁중에 새끼 곰 한 마리가 있었다. 세자의 아버지 효종은 곰이 성장하게 되면 사람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염려한 나머지 미리 후환을 제거하라고 명을 내렸다. 이에 세자 현종은 왕에게 간언을 올린다.
“곰이 아직 사람을 해한 일이 없는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염려하여 생명을 해치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입니다. 곰을 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효종은 흡족해 하며, “세자가 임금이 되면 의심을 사서 억울하게 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런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현종은 예송논쟁 등으로 아무리 과격한 상소를 올린 사람일지라도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면서 비록 유배를 보낼지언정 처형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현종이 어린 시절 불장난을 한 적이 있었다. 이를 본 보모 조 상궁이, “할아버지가 불로써 나라를 얻은 것을 배우려는가?”라고 중얼거렸다. 이것은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를 비난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먼 훗날 왕위에 오른 현종은 보모를 불렀다.
“그때 내가 그 일을 아바마마께 고하면 그대가 벌을 받을까봐 하지 않았다. 어떻든 그대는 나를 키워준 은혜가 있으니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대궐에서 나가 살도록 하라.”
현종은 보모를 더 이상 벌하지 않고 오히려 평생 먹을 것을 대주었다고 한다. 실록에는 현종이 얼마나 어진 성품이었는지를 말하는 일화가 유독 많이 전한다. 그 중 한두 개만 더 소개하기로 한다.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틀림없이 많은 사람이 다칠 것입니다."
이것은 현종이 7세의 나이 때 할아버지 인조에게 한 말이다. 인조가 진상품인 표범 가죽의 품질이 나쁘다며 되돌려 보내라고 명했을 때 어린 현종이 이런 말을 했다니 참으로 가상하지 않은가? 할아버지 인조는 어린 손자의 말을 따랐다고 한다.
현종이 언젠가 여염집에 나가 있을 때 그 이웃에 목소리 높은 자가 있어 시자(侍者)가 그리 못하도록 꾸짖자, 왕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떻게 소리를 안 낼 것인가.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어야지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현종 개수실록)
현종의 어짊은 대의명분에 치우쳐 불필요한 인정이나 베푸는 식의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현종은 명목뿐이었던 북벌을 공식 중단하는 대신 실질적인 국방력 개선에 힘을 쏟았다.
현종은 두만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내어 변경지대 백성의 안전을 지켰다. 또한 호남의 산군(山郡)에도 대동법을 확대했고 경기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현종은 병비에 유의하여 어영병제에 의한 훈련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현종은 곤장을 비롯한 형구를 개선하여 죄수의 고통을 경감시키기도 했다. 그는 재위 중 경신대기근을 겪으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했다. 이때 명재상 김육의 아들이자 병조판서였던 김좌명도 아사했을 정도로 기근이 심했다. 현종은 15년 동안 재위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그는 평생 후궁을 들이지 않고 한 명의 부인과 살았다.
[부언] 현종이 후궁을 들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부인 명성왕후(고종비 민비는 명성황후)가 워낙 드세서 그랬다는 식으로 말하는 역사가가 있었다. 인터넷에도 이런 식의 문답이 올라 있다. 이런 식으로 몰아간 텔레비전 드라마도 있었다.
후궁이 없었다는 것도 비틀어서 해석하는 조선사관이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왕조시대의 기준으로 후궁이 있고 없고는 군주의 자질을 따지는 것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현대적 관점으로 그것은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의 좋은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