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초에 필자가 출간한 소설 <혜주>의 내용을 토대로 ‘박근혜 게이트’와 연관시켜 재구성한 것으로 다음 스토리펀딩에 연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필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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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혜주> 표지 |
조선왕조 최대의 국난 임진왜란. 7년간에 걸친 왜구의 침탈로 국토는 유린되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그 무렵 조선은 내치는 물론 외치도 전부 엉망인 나라였다. 율곡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남쪽 왜구와 북쪽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조정에 건의했으나 끝내 좌절되었다. 당시 국가 재정이 허약한데다 문약(文弱)에 빠진 사림(士林)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무능한 군주 선조 임금은 독선과 아집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연산군 시대 이후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로 조정은 훈구파-사림파로 나뉜 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바다건너 왜구는 틈만 나면 조선을 넘보고 있어 마치 풍전등화와 같았으나 나라를 지켜낼 병졸과 무기는 태부족했다. 게다가 병사들의 군량미는 물론이요, 일반 백성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산천을 떠돌았다. 보다 못한 율곡이 선조에게 눈물로 상소를 올렸다.
“전하! 2백년 역사의 나라가 2년 먹을 양식이 없사옵니다. 지금 조선은 나라가 있어도 나라가 아니옵니다(其國非其國). 이 어찌 한심하다 하지 않겠사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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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곡 선생 |
닥쳐올 국난을 우려하며 시대를 걱정한 당대의 지성 이율곡. 그는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서 당시 조선을 ‘고칠 수 없는 썩은 집’과도 같다고 일갈했다.
“오늘 나라(조선)의 형세는 마치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둔 큰집(萬間大廈)에 비유할 수 있사옵니다. 크게는 대들보에서 작게는 서까래까지 썩지 않은 것이 없어 근근이 날만 넘기며 지탱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동쪽을 수리하면 서쪽이 따라 기울고, 남쪽을 뜯어고치면 북쪽이 휘어 넘어져서 어떤 장인(匠人)도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날로 더 썩어 붕괴될 날만 기다리는 그런 집과 오늘의 나라꼴이 무엇이 다르다 하겠사옵니까?”
그로부터 420여년이 지난 2016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과연 어떠한가?
10월 29일 오후 6시 서울 청계광장.
이날 오후 5시반경 광화문에 도착한 나는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순대국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6시경 촛불집회 행사장으로 향했다.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청계광장으로 가려던 나는 동아일보사 앞에서 발이 묶였다. 청계광장은 물론이요, 이미 동아일보 사옥 앞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들은 특정단체에서 일당 받고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제 발로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하늘같은 분노였다.
한 시간 남짓 집회를 마친 촛불 참가자들은 자연스레 시가행진에 나섰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출발한 시위대는 종각을 돌아 광화문 네거리를 거쳐 세종로에 진입했다. 시가행진 도중 누군가 “박·근·혜·는”이라고 선창하자 주변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퇴·하·라”고 화답했다. 몇몇 시위대의 손에는 ‘이게 나라냐’라고 쓴 손 팻말이 들려 있었다. 21세기 판 ‘其國非其國’(나라가 있어도 나라가 아니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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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에 참가한 한 시민이 ‘이게 나라냐’고 쓴 손 팻말을 들고 있다 |
반시간 가량 시가행진을 한 시위대 선두는 세종로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멈춰 섰다. 여느 때처럼 경찰이 또 길을 막았다. 결국 그곳에서 다시 집회가 열렸다. 노조 위원장, 대학생, 고등학생 등의 자유발언에 이어 엄마를 따라 나온 한 초등학생이 간이무대에 올랐다. 그 초딩은 “박근혜 아줌마 퇴진시키려고 나왔다”고 말문을 열고는 “그 이모가 아바타라며요? 꼭두각시라며요? 이게 무슨 일이죠?”라고 물었다. 박수가 터진 건 당연했다. 일국의 대통령이 일개 초등학생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대한민국, 이게 과연 나라인가?
작금의 대한민국은 임란 직전 조선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크게는 대들보(대통령)에서부터 작게는 서까래(말단 행정조직)까지 썩지 않은 것이 없다. 세월호 참사로 300명이 넘는 무고한 학생들이 백주에 수장(水葬)을 당했고, 경제는 파탄 나고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갈 길이 구만리 같은 청춘들은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떠돌고 있고, 나라 밖에서 대한민국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한지 오래다. 말이 OECD 회원국이지 일반 서민들의 삶은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개발도상국만도 못하다. ‘국민행복시대’는 천만의 말씀이다.
작년부터 박근혜 대통령에게 새 별명이 하나 생겼다. 바로 ‘여왕’이다. 입헌군주제도 아닌 민주공화국에 여왕이라니. 그러나 평소 그의 행태를 보면 천생 여왕 같다. 두 살 때 ‘장군의 딸’이 되었고, 불과 9살에는 ‘대통령의 딸’이 되었으니 여왕은 그 다음 코스였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청와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말하자면 그의 고향집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공주님’ ‘여왕님’을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눈이 삐어도 한참 삐었다.
기자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소설 쓰고 있네!”다. ‘사실(fact)’ 보도에 목숨을 거는 기자에게 ‘소설(fiction)’을 쓴다고 했으니 제대로 된 기자라면 칼을 빼들고 달려들 일이다. 그런 기자생활을 20여 년을 한 내가 문득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소설이 아니고서는 ‘여왕’을 소화해낼 길이 없었다. 오직 소설만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실컷 할 수 있다. 나는 2014년에 쓴 소설(<작전명 녹두>)에서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도 하야시켰고, 김정은을 서울로 불러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도 했다. 소설은 온갖 조화를 다 부리는 ‘요술램프’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 이번에도 소설로 한번 써보자. 주제는 ‘여왕’, 시대배경은 조선시대로 정했다. 그런데 이걸 어떡한다? 조선시대에는 여왕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여왕 셋을 배출한 신라시대는 너무 멀고. 결국 조선조에 없는 여왕을 하나 만들어내기로 했다. 전지전능한 소설의 세계에서는 못하는 것이 없고, 안되는 것이 없다. 주인공의 이름은 누구의 이름에 빗대 혜명공주로 정했다.(혜명공주는 장차 왕위에 오르는데 ‘혜주(慧主)’는 혜명공주의 줄임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지워진 조선조 유일의 여왕 ‘혜주’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작년 여름 내내 나는 혜주를 빚어내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한여름에 집필을 시작하여 가을이 끝날 무렵 대략 초고 1400매를 탈고 했다. 하루 평균 16시간씩 컴퓨터 앞에서 자판과 씨름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터넷에서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구할 수 있어서 집필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시대배경이 조선시대여서 생활양식 및 행태, 용어 등을 전부 조선시대화(化) 시켜야만 했다. 본문에 나오는 전통방식의 제사나 49재 지내는 법, 왕 즉위식, 각종 궁궐 및 왕가의 행사, 일부 ‘19금’에 해당하는 성(性) 의학서의 방중술 등은 관련 사이트를 찾아 고증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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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주의 ‘비록’이 발견된 제각. 사진은 진주 강씨 종중 제각 |
혜주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역사에 묻혀 있던 혜주는 꼭 400년 만에 비로소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KTX 신경주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천 송 씨’ 집안의 종택(宗宅·종갓집)이 있다. 이 집안의 종손 송 선생은 우연히 제각(祭閣)의 서실에서 400년간 어둠 속에 갇혀 있던 혜주를 찾아내 세상에 공개했다. 이 집안의 중시조 송문수가 ‘400년 뒤 공개’를 조건으로 남긴 ‘비전(秘傳)’에는 완벽하게 지워진 ‘혜주시대’가 오롯이 담겨 있다. 한민일보 특종보도로 혜주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자 학계는 “역사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중대사건”이라고 평했다.
혜주 출산(출간)에 앞서 나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산부인과(출판사)를 찾았다. 모두 네 군데였다. 큰 산부인과 두 군데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이 ‘혜주’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손사래를 쳤다. 그런 지체 높은 집안의 아이는 출산 후 ‘뒷감당’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동네 작은 산부인과 두 군데 문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이곳에서는 아이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줄 수 없다며 역시 사양했다. 결국 멀리 지방에 있는, 지인이 원장으로 있는 작은 산부인과에서 겨우 혜주를 낳았다. ‘혜주’ 생일은 2016년 1월 1일, 병신년 새해 첫날이다.
소설 혜주는 박근혜 정권에게 던지는 일종의 ‘경고장’ 같은 것이었다. 혜주는 왕자가 아닌 공주 신분이면서도 이례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는 궐내 정파 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정통성이 없는 혜주는 왕좌에 앉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 이후’다. 성정이 온후한 그였지만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자기 방어’가 심했고, 그 반대심리로 오만과 아집이 생겨났다. 한마디로 고집쟁이요, ‘불통’ 임금이었다. 그는 민 상궁과 좌·우 별직(別職) 등 측근 ‘3인방’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게다가 갈수록 심성마저 포악해져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하기 쉬운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사태는 예견된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일에 관심을 갖고 취재한 언론, 제대로 따지고 든 국회의원이 드물었다는 점이다. 최태민과 박근혜의 모종의 관계는 1970년대 박정희 시절부터 나온 얘기다. 정윤회-최순실 부부와의 각별한 인연 역시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2014년 봄 ‘드레스덴 선언’ 때 박근혜가 “통일은 대박”이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개성공단 폐쇄, 국정교과서 강행 등은 곪은 종기가 터진 것임에도 이를 간파한 명의 하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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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민 담화에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사과하는 박근혜 대통령 |
첫머리, 이율곡 선생의 상소로 되돌아 가보자.
‘기국비기국(其國非其國)’. 임란 때나 지금의 대한민국이 무엇이 다른가? 나라가 있어도 이건 나라가 아니다. 국가의 근본은 송두리째 무너졌고, 국가재정 또한 파탄 직전 상황이다. 천정이 무너졌으니 방바닥이 온전할 리 없다. 세계 최저 출산율에 자살률은 반대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1%의 부자들이 절대 다수의 ‘흙수저’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대한민국의 현실, ‘헬 조선’은 비유어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다.
대한해협의 거친 파도를 건너 부산에 상륙한 왜구는 경상-전라-충청-경기를 차례로 침탈한 후 한양을 거쳐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가히 파죽지세였다. 이에 놀란 선조는 평안북도 의주로 급히 피신하였다. 아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몸을 피할 작정이었다. 입만 열면 ‘만백성의 주인’이라던 그에게 만백성과 국토는 헌 고무신짝만도 못한 것이었다. 그런 군주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지금 대한민국이 꼭 그 짝이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외교, 국방, 경제 어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다. (혹자는 ‘지금 대한미국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선풍기 밖에 없다’고 비꼬기도 한다) 평소 입만 열면 ‘애국’ ‘안보’ ‘법치’를 강조해온 대통령이 ‘강남 아줌마’ 최순실을 앞세워 대기업을 상대로 ‘삥’을 뜯어 왔다. 그것도 모자랐던지 관(官)을 동원해 마치 쥐새끼처럼 나라의 곳간(국가예산)을 몰래 드나들며 제 배를 채워 왔다. 만약 포청천이 판관(判官)으로 나섰다면 아마 작두를 여럿 준비하라 명했을 것이다.
박근혜 집권 4년.
나라의 기강은 처참하게 무너졌고, 그로 인해 나라의 위신도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쳤다. 국민이 위임해준 공적 국가운영 시스템은 내팽개친 채 몇몇 비선실세 등 ‘사적 인연’을 국가통치의 골간으로 삼은 때문이었다. 이는 믿고 권력을 맡겨준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요,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에 대한 도발행위에 다름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해 ‘국기 문란죄’요, 조선시대로 치자면 대역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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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 모습 |
‘자진 하야’냐, ‘강제 퇴진’이냐.
이제 박근혜 대통령 앞에는 이 두 가지 선택뿐이다. 지난 10월을 기점으로 박근혜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무리한 생명 연장(대통령 자리 지키기)은 환자 자신과 주변사람들에게 고통만 가중시킬 뿐이다. 지금 박근혜는 420여 년 전 조선조의 폭군 여왕 ‘혜주’가 걸었던 ‘파멸의 길’ 끝자락에 서 있다. 박근혜의 퇴진은 단지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 이어 제2화 ‘술객(術客)의 나라, 무당의 나라’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