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배워야 할 조선의 미덕과 강점들
- 최고권력자의 7시간 잠적은 상상불허의 일
고려는 918년에 건국,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여 단일통합국가 만들었다. 고려는 훗날 무신집권과 원의 지배를 겪게 되면서 퇴보하지만, 전반기 200년 동안은 이전의 남북조시대에 비해 확실히 진일보한 역사를 구축했다.
고려는 골품제 폐지, 과거제도 시행 등으로 신라보다 합리적인 관료제를 갖추었고, 전시과 실시로 빈부격차를 완화했으며 노비와 천민집단의 해방으로 자유민의 수가 증가했다. 주지하듯이 고려는 1392년까지 475년 동안 존속했다.
조선은 고려가 가졌던 귀족제의 잔재를 획기적으로 털어냈다. 조선은 음서제를 축소하여 최고위직과 청요직의 아들에게만 관직 진출의 기회를 허용했는데, 그것도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만 그나마 아전 급의 낮은 벼슬을 주었다.
음서제의 축소는 자연히 과거제도를 확대시켜 노비와 중범죄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과거 응시가 가능해졌다. 초기에 고등문관시험인 문과 응시가 금지되었던 서얼은 명종 대 이후 단계적으로 문호를 넓혀가다가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차별이 완전히 철폐되었다.
조선인의 신분은 자유인인 양인과 비자유인인 노비로 구분되었는데 노비가 양인으로 올라가는 길을 수시로 터주어서 노비 인구가 축소되었고, 노비의 처우가 개선되어 생활이 어려워진 양인이 스스로 노비가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조선의 ‘양반’은 고위 공직자를 가리키는 말이지 세습적인 신분제 용어가 아니었다. 고위 공직자가 되려면 누구든지 문과를 통과해야 했다. 또한 교육기회도 대폭 확대되었다. 지방 군현마다 관립학교인 향교가 있어서 무료교육을 했고 사립학교인 서원은 향교보다 많았으며 마을마다 서당이 있어서 누구나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권력비리를 막는 시스템은 무서울 정도로 치밀했다. 최고 권력자인 왕과 왕자에게는 경연과 서연으로 교육시켰으며 그들의 언행을 감시카메라처럼 추적하면서 낱낱이 기록했다. 조선시대 같으면 최고 권력자가 백주에 7시간 동안이나 잠적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탐관오리의 자손 벼슬길 봉쇄, 사헌부의 거침없는 공직자 수사 기능, 상피제도(동일 부서 내 친인척 근무 금지), 수령의 자기 고향 부임 금지 등이 실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공론(公論)과 공선(公選)이 중시되었다. 그래서 수준 높은 언론이 활성화되었고 공개경쟁시험이 확대되었다. 특히 과거 7배수를 뽑는 1차 합격자를 8도 인구비례로 할당한 점이 퍽 인상 깊다.
토지사유제가 인정되었으나 토지 공개념의 정신을 강조했고, 특히 정치 주체는 사익 추구를 치욕적으로 여겼다. 과부, 홀아비, 고아, 독거노인 등의 결손가정과 빈민에게는 각종 경제적 지원을 했고, 3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한 처녀에게는 결혼비용을 지급했다.
우리는 조선성리학의 놀라운 수준과 성과를 따로 공부해야 한다. 아울러 역기능은 있었지만 당쟁이 가진 생산적 기능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당쟁은 오늘날의 정당제 역할을 하면서 독점 권력을 견제하는 순기능이 있었다. 조선은 당쟁이 활성화되었을 때는 문제가 적었지만 당쟁이 사라지고 노론의 일당독재가 이루지면서 국력이 급격히 이완되었다.
위와 같은 것들로만 보아도 우리는 조선사회의 성격을 함부로 봉건사회라고 규정할 수가 없다. 19세기에 들어서나 열린 서구의 근대사회는 자유, 평등, 민주를 실천하는 방법에서 개인과 인민의 저항을 중시한 반면, 조선은 전체 공동체의 도덕성을 중심에 놓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참고로 한영우는 조선을 근세관료국가, 브루스 커밍스는 농업관료사회라고 규정하는데, 나는 민본왕조국가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본다. (이상 한영우 저 <다시 찾는 우리 역사> 대폭 참조)
오늘의 한국, 고려말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 중국의 명왕조(1368~1644)가 몽고를 전복하자, 왜구와의 전투를 통해 강고히 단련된 신흥 군인집단은 권력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명나라가 고려 내의 예전 몽고영역에 대해 지배권을 주장했을 때, 고려 궁정은 친몽고 세력과 친명세력으로 분열되었다. 두 사람의 장군이 각기 자기 군사를 이끌고 요동반도에 주둔하던 명군을 급습하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인 이성계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압록강에서 군사를 돌려 고려의 수도를 공격해 곧 항복을 얻어냈다. 그는 그리하여 20세기까지 지속된 한국의 최장 통치왕조 조선(1392~1910)을 세우게 되었다. 새로운 국가는 1,500년 전의 고조선을 상기시키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서울에 도읍을 건설했다. -
- 이상,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61쪽
이 글에서 몽고는 몽골, 즉 원나라를 가리킨다. 원나라는 13세기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었으며 고려는 약 100년 동안 원의 지배를 받았다. 이에 따라 자주성을 잃은 고려 친원파 귀족들은 급격히 수구화되었다. 반면에 신흥 군인집단과 사대부들은 명을 선택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두 인물이 잘 알려진 대로 이성계와 정도전이었다.
그렇다면 친원파 보수군벌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였을까? 역시 우리가 잘 아는, 이름 뒤에 으레 ‘장군’ 칭호를 붙이는 최영 장군이다. 최영은 자기 서녀를 우왕의 비로 들여보냈다. 다시 말해 그는 우왕의 장인이었다. 최영이 무리한 영토 요구(철령위 설치)를 해온 명을 치기 위해 요동정벌을 기획한 것은 권력의 라이벌로 부상한 이성계를 멀리 보내려고 꾸민 일이었던 것 같다.
위 글의 3행에 나오는 두 사람의 장군은 누구일까?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였다. 최영은 스스로 요동정벌의 최고지휘관 직인 팔도도통사를 맡았지만 우왕이 만류한다는 구실로 개경에 남았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고려 말기의 상황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출생부터 의심을 받은 우왕은 권문세족의 횡포와 보수반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국가권력은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가 쥐고 있었고, 이들의 전횡은 극에 달해 있었다.
특히 토지 겸병이 자행되어 부자의 땅은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또한 땅 하나에 주인이 7~8명이나 되는 곳도 있어서 백성들은 이중삼중의 수탈을 당했다.
권문세족은 외교에도 둔감했다. 그들은 신흥하는 명을 적대시하고 퇴조하는 원을 추종하는 시대착오적인 외교를 펼쳤다. 어지러운 내정에 설상가상으로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여 해안지방의 백성들은 농사도 짓지 못하고 산속에 들어가 숨어 살기도 했다. 심지어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도 공격당하여 수로가 막혔으며, 수도인 개경까지 위험한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최영의 요동정벌은 정당성을 잃는다. 우리가 잘못 배운 역사는 이성계가 권력욕으로 왕명에 거역하여 위화도 회군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위에 인용된 브루스 커밍스의 책에서도 ‘이성계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성계는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는 마지못해 출병했으며 출병 전부터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의사를 분명히 개진했다. 물론 이성계는 요동정벌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성계는 신흥하는 명과 적대관계에 놓이는 것은 국가 장래에 해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때가 우기인 것도 사실이고 군량미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왜구의 위험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왜구는 개경 함락까지 넘보고 있었다.
이성계는 여러 차례 회군을 허락해 달라는 건의서를 보냈다. 하지만 이성계의 건의는 최영에 의해 번번이 묵살되었다. 이후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려 개경에 와서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창왕을 추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요즘 한국의 정세를 조선말기 또는 병자호란 전과 비슷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조선말이나 병자호란에는 외국군의 직접적인 무력 침공이 벌어졌다. 나는 당분간 한국에 외국군의 직접적인 무력 침공이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원나라는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고려를 100년 간 지배하다가 퇴조하고 있었다. 반면에 명은 신흥 강대국으로의 부상이 뚜렷했다. 나는 원과 명을 각각 미국과 중국에 유추해 본다. 그렇다면 당시의 최영을 필두로 한 권문세족은 누구일까? 미국에 집착하는 새누리당 세력이 아닐까? 오늘의 진짜 문제는 이성계, 정도전 같은 실력 있는 신흥세력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