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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26 반탁투쟁, 그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hognmor 2014. 10. 16. 18:58

‘미국의 음모에 이승만과 한민당이 야합’
김갑수 | 2014-10-15 13:36:1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반탁투쟁, 그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미국의 음모에 이승만과 한민당이 야합’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하여 조선을 분할 점령한 가운데, 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은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였다. 흔히 모스크바 삼상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에서는 난항 끝에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를 도출하여 발표했다.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임시정부를 건설한다.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한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 중에서 가장 예민한 사항은 세 번째인 ‘5년간의 신탁통치’에 있었다. 일단 신탁통치란 민도가 낮아 자치능력이 없다고 판단될 때 실시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탁통치 결정이 전적으로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소 민족적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이때 좌우익이 합치하여 신탁통치 안을 수용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물론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가 없다. 참고로 2차대전 후 4강대국의 신탁통치안을 수용한 오스트리아는 10년간의 신탁통치 끝에 독립을 이루었다. 물론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상황은 다른 점이 있어서 동격으로 비교될 수는 없지만, 좌우익의 대립이 있었다는 점에서 두 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친일파에게 있었다. 친일파들로서 신탁통치란 곧 자기들의 몰락을 의미했다. 여기서부터 친일세력의 본산인 한민당의 음모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당시 김성수와 송진우가 주도한 한민당과 동아일보는 한통속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김성수와 송진우는 공히 친일이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1945년 8.15 이후 동아일보가 첫 발간된 것은 1945년 12월 1일이었다. 이어서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6일 자에 [미· 영· 소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 문제 논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어지는 동아일보의 기사를 살펴보자.

1945년 12월 24일 [소련이 청진과 원산에 특별 이권 요구]
1945년 12월 25일 [소련이 대일 참전의 대가로 한반도를 차지하려 한다]

당시 어떠한 외국 신문에도 이런 기사는 난 적이 없다. 동아일보는 선동을 위한 조작기사를 내기 시작한 것이며 이 배후에는 한민당과 이승만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인 1945년 12월 26일 [이승만, 방송에서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하고 있다고 시사]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12월 27일, 최악의 조작기사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을 대서특필로 실었다.

이 모두가 친일경찰과 동아일보와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 등이 결탁한 음모의 소산이었다. 태도를 바꿔 반탁에 신중론을 제기한 송진우가 암살된 것은 바로 이즈음 12월 30일이었다.


반탁투쟁은 종북몰이의 원조
노 혁명가 김구가 놀아난 애통한 형국’

8.15 정국을 내외적으로 세심히 고찰해 볼 때 당시 조선처럼 불운한 나라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애초부터 조선의 체제분단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부정하는 반탁운동에 거부감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 시간에 미국의 대외정책이 암암리에 급변하고 있었다. 1943년 창설된 미 국방성, 즉 펜타곤의 네오콘들이 주도하여 미국의 대외정책은 공산권과의 ‘냉전 만들기’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와 관계가 틀어진 이승만은 1946년 12월 4일 새로운 지지 세력을 얻기 위해 미국행에 나섰다. 이승만은 이듬해인 1947년 4월 21일까지 무려 4개월 14일 동안이나 미국에 머물렀다. 사실 이승만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미국 행정부나 의회가 그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소련과의 협력에서 반공노선으로 돌아서겠다는 선언이었다. 이것은 곧 냉전의 선포였고 동시에 조선의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트루먼이 이승만을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이승만의 천운(天運)이자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1947년 4월 21일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승만은 더 이상 ‘떠날 때의 이승만’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후속으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를 미국이 고의적으로 결렬시킨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1월 16일 서울 덕수궁에서 처음 열렸는데 미국은 소련에 번번이 트집을 잡았다.

1947년 8월 28일, 미국은 난데없이 한국 문제를 미·소·영·중 4개국 회담에 맡기자고 제안했고, 9월 17일에는 한국 문제를 아예 국제연합에 상정해 버렸다. 9월 26일 소련은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을 제안했지만 미국이 거부했으며, 10월 18일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를 제안했고, 마침내 10월 21일 소련의 대표단 철수로 미소공동위원회는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신탁통치안은 물 건너간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당시 김일성과 김규식과 여운형 등은 신탁통치에 찬성했거나 반탁 투쟁에 반대했다. 친일파들은 반탁에 소극적인 사람들에게 여지없이 ‘빨갱이’ 색깔을 씌웠다. 오늘날 창궐 중인 종북몰이는 그 원조가 반탁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애통한 것은 김구의 처신이었다. 70의 노 혁명가 김구는 국제정세를 읽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영광스러운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내세워 반탁투쟁을 주도함으로써 이승만과의 우익진영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구가 친일파와 한민당과 이승만에게 시종일관 농락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김구가 김일성과 좌우합작을 하기 위해 38선을 넘은 것은 1948년 4월 13일, 정국을 돌이키기에는 한참 뒤늦은 시간이었으며, 반공으로만 일관했던 그의 갑작스러운 변신 또한 결코 합리적인 것으로 비치지는 않았다. 하여 “38선을 베고 죽겠다”는 그의 절규 역시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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