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영전에 올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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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는 3살 되던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에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되어 여우내 외가에서 살다가 18살 되는 해에 호근리로 시집오셨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는 처음은 돈오름에 살다가 덕두캐로 집을 사서 이사를 한 지 4년 만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음해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사람들은 삼살방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고 들었다 하셨습니다. 외할머니는 외삼촌 한분과 이모 세분을 낳으셨는데 그 중 제가 만나본 분은 외삼촌과 이모 두 분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사시다가 조상 묘소에 비석을 세우러 오셨던 외삼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 뵈었고 이모 한분은 가시리에 사셔서 두세 번 뵈었고 또 한분의 이모는 물도왓에 살다가 일본 대판에 가서 사셨는데 내가 중학교 때에 호근리에 들리셔서 그 때 갖고 온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던 게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께서 3살 되던 해 덕두캐 집이 바닷가에 바짝 붙어 있어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노는 어머니를 두고 잠깐 모슬 다녀온 물도왓 이모가 어머니가 파도에 떠내려가 아이들이 꺼내려다가 파도가 치면 놓치곤 하면서 점점 멀리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그 즈음 서툴게 배운 헤엄을 쳐서 어머니를 바닷물에서 꺼내어 죽은 줄 알고 엎지르고 뒤집기를 반복하며 울부짖다 보니 살아났다고 하셨습니다. 그 해 겨울에 외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외삼촌은 여우내 외가에 가서 살았는데 어머니가 16살 되는 해에 어머니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외사촌 오빠네 아기들을 돌보면서 살다가 18살 되는 해에 호근리로 시집을 오셨습니다. 외사촌 오빠의 신부가 호근리 저의 고모할머니였던 게 인연이 되어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첫 해에 거문머들 밭을 빌려 바닷가에서 모래를 실어다가 거름으로 뿌려 제충국 농사를 했는데 대풍작을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해 제충국 농사는 장마로 모두 썩어버려 실패했고, 그 뒷 해에는 고구마 농사를 했는데 농사가 어찌나 잘 되었는지 그 해에 처음으로 밭을 사게 되었는데 그게 생목골 밭이었다 하셨습니다. 이 밭은 내가 중학교 때 팔아 강정 논을 샀는데 그 논에서 수확한 쌀과 볏짚을 화물차에 가득 싣고 뿌듯한 기분으로 집으로 오던 추억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어머니께서는 딸을 다섯 낳으셨는데 첫째는 수동이로 9살 되는 해에 병으로 죽었고, 둘째인 지금 큰누님을 낳는 해에 호근리 1273번지에 집을 지어 이사를 온 후 셋째 딸이 태어났으나 3살 되는 해에 죽고, 해방되기 전 해에 형님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환이 겹쳐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후 몇 년 없어 증조할아버지까지 돌아가셨습니다. 넷째 딸인 부산 누님이 태어난 이듬해에 제주 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4.3사건이 일어나 아버지께서는 낮에는 군경에 시달리고 밤에는 무장대에 시달리는 고통스런 삶을 3년 동안 살아야 했습니다. 부산 누님의 뒤를 이어 남자아이가 연이어 둘이 태어났으나 세 살과 석 달 만에 죽었고 그 다음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우리 집 막내 딸 일선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시고 한 푼 두 푼 아끼고 조냥하는 생활로 꾸준하게 재산을 일구셨으니 맨 처음 산 생물골 밭 이후에 땅고아진밭, 돔베낭골밭, 거문머들밭, 비케왓, 구시물밭, 종나물밭, 돗새 에움밭, 지금 사는 집터, 원통밭 등 많은 땅을 사 모으셔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생활 할 수 있는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누님이 그 동안 고생하신 덕택임을 늘 잊지 않고 고마운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들은 마음과는 달리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하고 너무나 많은 불효를 하였습니다. 아흔이 넘으신 어머니께 혼자서 조석으로 음식을 만들어 드시게 하였으며, 환갑, 진갑, 팔순, 구순을 맞아서도 자식들이 모여 생신상을 한 번도 제대로 차려드리지 못하였고, 어머니께서 짚고 다니실 지팡이조차 변변한 것을 마련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저희들에게 서운한 내색을 한 번도 하시지 않으시고 저희들이 화목하게 잘살기만을 바라시며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봐주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께서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상태인 것도 모르고 며칠을 심한 고통 속에 집에서 지내도록 무심하였고, 병원에 입원을 하셨을 때도 저희들은 어머님이 저희들을 키워주시던 정성에 만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병수발로 어머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저희들 사는 데만 정신을 팔아 그 동안 어머니가 겪으시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조금도 헤아려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중환자실에서 간병인 병실에서 어머니께서 그렇게 드시고 싶어 하셨던 돗괴기 한 점 조차 드시도록 하여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저희들 곁을 떠나시게 한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어머님께서 살아오신 삶은 부처님이 살고 가신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어려서는 고아로 외가와 외사촌 오빠 집에서 아기를 돌보고 심부름을 하며 사셨고, 시집오셔서는 시조부모와 시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셨고, 아홉 명의 딸과 아들을 낳는 고통을 감내하셨으며, 아버님께는 극진한 내조로 아내의 도리를 다하셨으며, 저희들을 이렇게 사람 되게 키워주시면서 어머님 자신을 위한 삶은 모두 버리셨으며, 남들에게 해가 되는 삶은 티끌만큼도 없으셨으니 부처님의 삶과 어찌 다르겠사옵니까. 저희들은 어머님께서 틀림없이 극락왕생하시리라 굳게 믿고 있사옵니다.
이제 어머님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가신 지 벌써 49일 째가 되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오늘 새 세상에서 좋은 인연을 맺고 새 삶을 시작하고 계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희들과의 인연보다 더 좋은 새 인연을 맺어 불국정토에서 행복한 삶을 사시옵소서. 저희들이 훗날 어머님과의 인연을 찾아 나섰을 때 저희들을 그 곳으로 이끌어주시옵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불기 2557년 9월 21일
불효자 종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