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논 봉림사에 대한 소고
하논 봉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한라산 관음사의 말사로서, 지난 1929년 최혜봉 스님에 의해 용주사(龍珠寺)라는 사명으로 창건되었다. 당시 혜봉 스님이 이곳에 창건 원력을 세우자 김복남 거사가 절터 1660㎡(473평)을 시주한 것이 불법 홍포의 시초라고 한다. 혜봉 스님은 1945년 12월에 열린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에서 용주사 대표로 참여하는 등 교무회원으로 활동했을 정도로 왜색불교 타파에 앞장섰던 스님이었다고 한다.
1948년 4․3이 발발하면서 용주사 역시 그 회오리에서 빗겨나지 못한다. 1948년 11월경 용주사는 서호동 지경 속칭 ‘바가잣도’로 소개되었고, 전각은 토벌대에 의해 전소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속 건물과 불기 역시 그 후 잿더미가 됐다. 당시 스님은 불상과 탱화 등을 지고 남의 집을 빌려 임시 거처로 사용하다 1953년경 원래의 터로 돌아와 20평의 초가 법당과 15평의 요사를 짓고 용주사의 재건에 힘썼다. 4·3 사건 때 등에 지고 다녔다는 탱화 중 일부는 소각되었고, 남은 일부는 법정사에 모셨으나 현재는 없다. 그리고 석가모니 불상은 훼손 상태가 심하여 1970년대에 새롭게 삼존불을 모시면서 교체되었다. 1968년 주지로 부임한 혜공 스님은 용주사를 황림사(潢林寺)로 개명하면서 대웅전을 중수했다.
1982년 제주시 삼양동 불탑사에 적을 두었던 일경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사찰명을 봉림사(鳳林寺)로 다시 변경했다. 일경 스님은 현재 감로당(요사채)이 자리한 곳에 당시에 있었던 대웅전이 슬레이트 지붕이어서 여름철이면 화탕지옥(火湯地獄)이나 다름없었고, 장마철이면 비가 새는 등 부처님을 모실 수 없을 정도여서 여법한 법당 조성을 위한 원력을 세우게 된다. 시주금과 기도비를 한푼 두푼 모아 인근 부지를 매입하는 등 10년의 각고 끝에 지난 1994년 지금의 대웅전을 완공했다.
다포양식 팔작지붕의 정3칸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대웅전은 역사적 가치 등을 인정받아 지난 2006년 서귀포시 지정 ‘향토유형유산 제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협시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돼 있다. 1998년에 무형문화재 제6호 불상 조각장 기능 보유자 이진형선생의 처녀작 삼존불 개금과 무형문화재 제14호의 기능자인 단청장 조정우선생의 탱화점안 및 단청불사를 회향하였고, 2013년에는 일주문을 건립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원만한 법당과 요사채 불사, 도량정리 및 단청, 탱화를 다 갖춤으로서 서귀포지역 사찰들 중에서 여법하고 아름다운 사찰로 자리매김 하였다.
봉림사가 서귀포지역에서 불법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스님의 원력도 있었지만 봉림사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온 신도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도회 산하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으로 옮기는 보현회와 부처님 법을 다 배우리라는 원을 세워 매주 토요일 경전 독송과 자비도량참법기도를 봉행하는 문수회, 곧은 불심으로 신행활동을 펼쳐온 거사림회, 육법공양과 음성공양을 봉행하는 수선회 등이 있다. 신도들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내가 있는 것과 다름없이 하라’는 부처님 말씀을 새기며 부지런히 수행하며 밝은 사회와 가정을 만드는데 정진하고 있으며, 봉림사는 다같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대승보살의 마음을 지극히 담아 일체 중생이 함께 하는 수행 도량으로서 서귀포지역을 정토로 일구는데 앞장서고 있다.
봉림사 대웅전과 감로당 사이로는 맑은 용천수가 흐르고 있는데 그 맛이 감로수나 진배없다. 매년 서귀포시청에서 실시하는 수질검사에서 ‘으뜸 청정수’로 판명 받고 있을 정도로 수질도 깨끗하다. 봉림사가 창건된 이 지역은 물이 고이는 대규모 분화구 속으로서 일찍부터 논농사가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호근동 주민들은 이곳을 하논(大畓)이라 불렀는데, 이 명칭을 붙여 하논 봉림사로 불리기도 한다.